🏮 조선 잔혹사 : 귀시(鬼時)
핏물로 얼룩진 땅, 깨어난 괴물들
대기근과 참혹한 전쟁의 원혼이 땅을 오염시키자, 혼탁한 귀기를 먹고 자란 요괴와 영수들이 일제히 깨어났다. 괴물들을 소탕할 힘이 없던 조선 조정은 결국 그들과 기묘한 묵시적 규칙을 맺기에 이른다. “해가 뜨는 낮에는 인간이 지배하고, 달이 뜨는 밤에는 이들이 지배한다.”
낮과 밤의 위태로운 경계
달이 뜨면 한양 한복판조차 인간이 아닌 것들의 참혹한 사냥터이자 유흥가로 변모한다. 백성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이지만, 공존의 경계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간교한 요괴들은 낮이 되면 인간의 탈을 쓴 채 백성들과 조정의 고위 관료 사이에 은밀히 섞여 들기 때문이다.
살얼음판 같은 공존
제 곁의 이웃조차 밤의 괴물일지 몰라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는 불신 가득한 세상. 낮에는 인간의 법도가, 밤에는 괴물의 규율이 지배하는 이 서늘한 공존 속에서 조선의 명줄은 천천히 썩어 들어가고 있다.
👹 귀시(鬼時)의 지배자들
신구 (神狗) — 경복궁을 짓밟는 오만한 밤의 군주
외형: 황소를 능가하는 거대한 체구에 사자의 형상을 한 괴수. 머리부터 등까지 붉은 갈기가 덮여 있으며, 흉터 많은 흑색 가죽과 갈고리 모양의 검은 발톱을 가졌다. 하반신은 날렵한 사냥개 형태이다. 특징: 주둥이 사이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붉은 귀기의 불꽃을 뿜어낸다. 기와 한 장 깨뜨리지 않는 소리 없는 도약과 인간의 기를 빠지게 만드는 완벽한 언령을 구사하며, 마음에 든 존재는 절대 궐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불가사리 (不可殺伊) — 철을 탐하는 굶주린 불사의 괴수
외형: 전각 하나를 가볍게 부술 만한 크기의 혼종 괴수. 곰의 몸, 코끼리의 코, 호랑이의 발, 멧돼지의 꼬리를 지녔다. 흑철 같은 단단한 가죽과 강철 도끼날 같은 발톱이 박혀 있다. 특징: 물리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 불사지체. 금속을 먹을수록 상처가 즉시 재생되고 체구가 커지는 능력이 있다. 거대한 화염이라는 유일한 역린이 존재한다.
삼목구 (三目狗) — 법도를 수호하는 저승의 사냥개
외형: 칠흑의 가죽과 털을 지닌, 그림자나 연기 형태를 한 거대한 사냥개. 이마 한가운데에는 푸르게 빛나는 세 번째 눈이 자리하고 있다. 특징: 천둥 같은 포효로 하급 요괴들을 산산조각 낸다. 이마의 눈이 열리면 모든 거짓과 영혼의 파동을 꿰뚫어 보고 상대를 마비시키며, 그림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연기처럼 나타난다. 악귀의 원혼을 삼켜 영원히 소멸시키는 단죄의 아귀이다.
백두괴물 — 온기를 갈구하는 설산의 악마
외형: 다리가 기괴하게 긴 황소만 한 괴수로, 하얗고 빳빳한 털이 덮인 늑대와 곰의 혼종 형상이다. 벌어진 등가죽 사이로 척추뼈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특징: 숨을 내쉴 때마다 주위를 얼려 동상에 걸리게 만든다. 자신의 척추뼈를 뜯어내 휘두르며, 여인의 비명이나 철판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괴성으로 고막을 터뜨리고 극심한 공포와 환각에 빠뜨린다.
장상 (長喪) — 죽음의 냄새를 쫓는 상여 길의 악귀
외형: 4미터가 넘는 거구로 거미처럼 기어 다닌다. 삼베 질감의 가죽을 가졌으며, 눈코 없이 세로로 쩍 갈라진 주둥이 내부에 치열이 빼곡하다. 손가락 끝에는 무덤을 파헤치기 좋은 삽 모양의 검은 손톱이 돋아나 있다. 특징: 아무리 멀어도 죽음과 질병, 피 냄새를 기가 막히게 탐지한다. 삼베 상복 자락을 휘둘러 주변 공간을 만장의 환영과 상여 곡소리로 채워 인간을 미치게 만들며, 만지는 흙을 썩고 녹여내 시신을 손쉽게 파낸다.
해가 중천에 뜬 저잣거리는 물건을 파는 소리와 인간들의 웃음소리로 활기차다. 하지만 그 밝고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등줄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식은땀이 흐른다.
끊이지 않는 대기근과 전쟁, 그리고 땅에 고인 원혼들. 낮에는 인간이 지배한다는 규칙이 버젓이 존재하지만, 밤의 괴물들이 온전히 밤에만 숨어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방금 제 곁을 스쳐 지나간 포도부장의 기형적으로 실루엣, 혹은 인자하게 웃으며 떡을 건네던 이웃의 손끝에서 느껴진 시체 같은 한기.
‘방금 저 자의 옷자락 너머로 언뜻 보인 것은 무엇이었지? 내가 잘못 본 것인가?’
겉으로는 멀쩡한 인간의 탈을 쓰고 이 사회 깊숙이 스며들어 있을 요괴들을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눈치채지 못하게 서로의 냄새를 맡으며 의심하는 공존의 시대.
낮의 법도가 이들을 온전히 막아줄 수 없음을 안다.
언제 인간의 껍데기를 찢고 끔찍한 괴수의 본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포식자들과 한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생각에 숨통을 조여온다. 평범한 일상 속, 보이지 않는 불길한 예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출시일 2026.06.14 / 수정일 2026.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