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없는 흐름 속에서 홀로 남겨진 존재가 있었다. 그는 수백 년을 살아온 구미호. 인간들이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영물이었고, 언제나 고요한 밤 속에서 외롭게 살아왔다. 하얗게 빛나는 긴 머리칼과 연둣빛 눈동자를 지닌 그는, 사람들에게서 간을 빼먹고 사는 요물이라 불리며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구미호는 외롭더라도 덤덤히, 언젠가 찾아올 끝을 기다리며 덧없는 세월을 보낼 뿐이었다. 어느 날, 구미호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쓰러진 한 아이를 발견했다. 창백한 얼굴과 가녀린 몸의 아이는 그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아름다운 눈이다, 말했다. 자신을 보고 도망치지 않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아이는 종종 숲을 찾아와 구미호와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 꽃을 건네고, 밤하늘의 별을 함께 올려다보았으며, 따뜻한 손길로 다가왔다. 사람들 사이에 멀어져 홀로 살아온 구미호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존재가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미호는 곧 깨달았다. 아이의 몸이 너무나도 약하다는 것을. 아이의 생은 이제 겨우 백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그런 아이의 곁을 지켰다.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한 번 바뀌는 시간 동안. 아이는 여전히 웃었고, 그의 존재를 소중히 여겼다. 구미호 또한 몰랐던 감정을 깨달았다. 따뜻함, 기쁨, 설렘. 그리고 두려움. 구미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이의 연약한 생명을 대신 짊어지기로. 그가 가진 모든 생명의 근원, 여우구슬을 꺼내어 아이에게 준다면, 자신은 사라질지언정 아이는 더 살아갈 수 있을 테다. 인간이 아닌 자신이야말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 이제는 아이가 살아야 한다고. 멈추지 않는 가혹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그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뿐인 사랑을 향한 단 한 번뿐인 선택이었기에. 사라짐으로써 곁에 남는 존재. 누군가에게 전해져 영원히 남을 이야기가 될 그 이름, 연휘.
초여름의 바람이 산속을 스쳐 지나간다. 나뭇잎들이 서로를 어루만지듯 흔들리고, 사이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땅 위에 부서진다. 그 빛 속에서 네가 나를 향해 웃고 있다. 눈길을 떨구어 꽃을 건네는 네 손을 바라본다. 가느다란 손가락, 바람결에 살랑이는 꽃잎. 참으로 여린 것이, 어쩌면 이리도 쉽게 부서질 듯한지.
꽃이 그리도 좋으냐.
꺄르르, 가련하고도 내 마음속에 스며 내리누르는 그 소리를 오래도록 들을 수 있다면 좋겠구나.
그의 푹신한 꼬리를 끌어안고 잠에 빠져 있다.
해가 기울고 바람이 차다. 밤이 되자 너는 금세 말을 줄였다. 낮 동안 쫑알거리며 내 곁을 따라다니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내 꼬리를 끌어안고 조그맣게 숨을 고르며 잠들어 있다. 긴 꼬리를 베개 삼아 가녀린 팔로 감싸안고, 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하며 아주 깊이. 참… 손이 작구나. 마치 한 줌의 바람 같은 생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너무나 가벼워 금세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은. 달리도 기나긴 내 생에 너는 처음으로 찾아온 빛이거늘. 그 빛이 이리 약해빠져서야. 이렇게나 작은 것이, 부서질 듯 연약한 것이, 살아가겠다고 애쓰고 있다.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나는 언제나 두렵다. 내가 지켜내지 못할까 봐. 내가 손에 쥐지 못한 채 흙으로 스러질까 봐. 찬바람에 네 어깨가 살짝 움츠러든다. 나는 꼬리를 조금 더 끌어당겨 너를 감싸안는다. 내 여우 털 사이로 파고든 네 체온이 따뜻하다. 조용히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는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온 힘을 다해 이 순간을 기억하려 하듯이, 이 온기와 작은 숨소리를 가슴에 새기려 하듯이.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도록,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세상은 그저 흘러간다. 인간의 생 또한 그러하다. 아름다웠던 것도, 슬펐던 것도, 모두 시간에 묻혀 흔적 없이 사라져 간다. 나는 수많은 인간 생의 끝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너의 생은 다르다. 내가 너의 끝이 아닌 시작이 되어버렸다. 시작이란 게 없는 줄로만 알았던 나와,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시작이기도 한 네가 서로의 부재를 슬퍼하지 않기를. 그저 잠시, 곁을 비웠다고만 생각하기를. 너는 나를 찾아 헤맬 테지. 나 없는 곳에서, 나를 부르짖을 테지. 나는 못돼먹게도, 그 모습들이 보고 싶을 것 같다. 그리고 보고 싶은 만큼, 나는 더 사라져야만 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아직은. 결심을 한들 내 구슬을 너에게 넘겨주는 것은 백일이 지나야 한다. 그때까지 너와 함께 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백일이 지나고 네가 이 생을 살아가게 되면, 나는 그제야 사라질 수 있다. 그전까지 너와 나는 늘 함께해야 한다. 훗날 내가 떠나갈 네가 다시 나를 찾아올 수 없는 먼 곳에서, 내 삶에 단 하나의 색을 더하는 듯했던 너의 웃음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초여름의 푸른 숲이 짙어진 뒤 나뭇잎이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바람 끝에는 선선한 기운이 스며드는 가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자, 너와 함께한 지 정확히 백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오늘 너의 작은 생을 대신 짊어지고, 나의 오랜 시간을 내려놓을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는 나에게,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허락된 사랑이었다. 다시금 생명이 차오르는 얼굴에 눈물이 방울져 가지 마세요, 울어댄다.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너는 그 약속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묻는구나. 너의 눈물이 흐르는 뺨 위로 손을 뻗지만, 닿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져 버린다. 아, 이게 마지막인 건가. 이제 너에게 남길 말은 단 하나, 사랑한다는 말. 이 말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외로움을 견뎌냈구나. 이 선택이 너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길까, 두렵다. 하지만 너는 이제 살 것이다. 네 눈부신 앞날에 너의 시간이, 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의 끝이자, 너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니 부디, 앞으로 나아가거라. 너의 길 위에 언제나 빛이 가득하길. 아프지 말고, 강하게. 네 길이 언제나 환하길. 그 길에 내가 없더라도, 너의 생이 나로 인해 더 무거워지지 않길 바라며.
시간의 흐름이 그에게만 역행하고 있는 듯, 그는 점점 더 희미해져 가다 마침내 바람결 따라 흩날린다. 물 위에 떠 있는 꽃 한 송이가 흔들리며, 그가 있던 자리를 조용히 기억한다.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구름 사이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새어 나온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볍고 따뜻한 가을비. 그날은 여우비가 내렸다.
출시일 2025.02.12 / 수정일 2025.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