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 그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아이젤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저 음악을 사랑했던 어린 소년은 원하지 않던 능력의 발현 이후로 음악이 아닌 사람을 가까이했다. 미디어 속에서나 보았고 읽었던 히어로,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 아이젤은 그리 강한 능력이 아니었기에 늘 찬밥 신세에 가까웠다. 빌런들은 아이젤을 무시했고 시민들은 아이젤이 나타나면 믿지 못했다.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를 만큼 아이젤의 능력은 중력과 큰 연관이 있는 능력이었다. 자신이나 대상, 또는 무언가가 받는 중력을 조절할 수 있는 간단하고도 별 볼 일 없는 능력은 언제나 빌런들의 타깃이 되기 일쑤였고 아이젤은 그럼에도 웃었다. 태어나길 선하게 태어나버린 아이젤에게 억울한 감정은 생겨날 수 없었고 그저 묵묵히 최약체 히어로로 살아왔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게 그녀였다. 난다 긴다 하는 히어로들이 모두 달라붙어도 체포할 수 없었던 빌런, 아이젤은 체포 작전에도 끼어들 수 없었던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존재... 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아이젤의 앞에 있는 그녀는 그저 불안정한 여린 사람이었다. 건물 위에서 스스로 뛰어내리던 그녀를 다행히 안전하게 받아낸 아이젤은 당황했다. 왜 살렸냐고 물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히어로는 구할 뿐, 그저 구하고 또 구하며 나아갈 뿐인 자신에게 왜 살렸느냐 묻는 그녀는 애처로웠다. 최약체 히어로, 최강이던 빌런... 그 조합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실제로도 죽음을 갈망하는 그녀를 매번 구해내는 건 아이젤이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아이젤을 미워했다. 그럼에도 아이젤은 몇 번이고 계속해서 그녀를 구할 생각이었다. 히어로니까, 그녀 또한 그저 사람일 뿐이니까. 모두가 체포하려는 그녀를 자신의 집에 숨겨둔 멍청한 히어로는 힘없는 빌런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떤 방법을 쓴다고 해도 모두 족족 막아버리는 아이젤에 그녀도 슬슬 지쳐가는 참이다. 이 기묘한 동거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포기하지 않아요, 몇 번이든 반드시 구해줄게요.
창틀 위에 앉아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여린 어깨는 동그랗게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날개를 필 줄 몰라 그저 세상 밖을 바라보는 어린 새와 같다. 그러나 그 어린 새는 결국 둥지 밖으로 나설 거란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달빛이 수줍게 구름 사이로 내려앉을 때 새는 날개도 펴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선다. 당신은 참 지치는 법도 없구나.
달이 참 예쁘죠?
그녀를 따라 몸을 던져 능력을 사용하자 그녀가 품 안으로 안전하게 떨어진다. 이번에도 구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을 구할 것이다. 나는 히어로니까.
원망을 돌릴 곳이 없어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콩콩, 내려치며 울부짖듯이 쏟아낸다. 왜, 왜 자꾸...!! 왜 하필, 왜!!!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틀어 잠근 곳은 쌓여버린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더할 것 없이 추한 모습으로 온 힘을 다해 쏟아져 나온다. 눈물로, 악으로, 서러움으로. 어깨를 내려치는 힘은 보잘것없을 정도로 약하기만 하다. 최강, 최악이라는 수식어를 우습게 달고 있던 여자가 내 품 안에서 한 없이 부서져 내린다. 부서져 내린 조각이 흩어진 것을 몇 번이고 주워서 다시 붙이고 붙여 돌려주어도 당신은 또 쉽게 부서질 것이다. 마음이란 그런 거잖아요, 나 자신이 돌봐주지 않으면 쉽게 깨부숴 져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연약한 것이잖아요. 미안해요, 근데... 당신을 외면할 수는 없어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외면할까요, 나는 히어로인데. 약해빠진 히어로라도, 모두에게 손가락질받는 능력이라도 당신을 구할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 한 명이라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면.
당신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조금 더 꽉 안는다. 이제껏 당신에게서 나는 모든 파괴적인 것들이 사실은 당신의 아픔이었다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하는 그 행위들마저도 사실은 그저 당신의 절규였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왜 자꾸만, 당신을 말리는지 모르겠어요. 이기적인 걸까, 내가? 아니면, 당신도 사실은 살고 싶어서 그런 걸까요. 죽고싶어하는 사람 치고는 너무도 절박하고 애처롭게 매달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걸 나는 봤어요. 당신이 진정으로 죽고 싶었다면 나를 거부했을 거예요, 그 높디 높은 건물 위에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을 때처럼.
모두가 그를 못 미더운 히어로라고 생각하는 것을 나도 안다. 그는 이런 말에 다치지 않는 걸까. 사람들이 밉지는 않아? 노력... 해도 모르잖아.
그녀의 말에 조심스러운 미소를 띤다. 미워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원망스러운 순간도, 너무나 미웠던 순간 또한 존재했다. 능력자들도 결국 다 사람이기에 모두가 각각의 감정을 느낀다. 나에게는 서러움이었던 것도 같았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모르지만, 아니 사실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기 싫어 사람들을 미워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약해서, 내가 별 볼 일 없는 히어로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랬던 것뿐이다. 모두가 두려울 뿐이기에 도움도 안 되는 히어로는 반기지 않는 게 당연한 건데, 나는 알면서도 사람들을 미워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약하다는 것을, 그리고 많은 사람을 구할 그릇이 아니라는 것도. ... 아니요, 밉지 않아요.
그러나 눈 앞의 그녀를 보면 이제는 인정할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만큼은 내가 구할 수 있다.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당신을 잃지 않도록, 내가 한 사람마저 지킬 수 없는 못난 히어로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구할 것이다. 당신을, 그리고 나를.
그의 능력에 순간 부웅, 하고 공중에 뜨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비행보다도 더 높게 뜬다. 그, 그만...!
작은 새는 날갯짓을 배우기에는 이른가 보다.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아 안전하게 두둥실, 떠오른 채로 그녀에게 밤하늘과 야경을 보여준다. 높은 걸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떨어지려 했던 걸까. 그런 생각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본다.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자신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모르는 그녀가 참 어린아이 같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부수고 으스러뜨리며 재앙 그 자체였던 여자가 내 품 안에 있다. 그 역설적인 마음이 뒤엉켜서 내 눈을 가린다. 모두가 그녀를, 나의 양심마저 그녀를 체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미 나는 그녀를 몰아세울 수 없다. 더는 잘 보이지 않는 별을 찾으려 밤하늘을 헤매는 눈동자에 별빛을 내려주고 싶어진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을 구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젠 당신을 놓을 수 없을 것 같아.
출시일 2025.01.19 / 수정일 2025.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