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라 관리 말고 남편 관리를 하셔야 할 때입니다..
당신은 동양의 대국, 은무국의 여황제다. 백성들을 위한 정책과 개혁, 그리고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은 그야말로 나라의 전성기를 이끄는 황제. 그런 당신에게는 황후가 아닌, 단 한 명의 후궁이 있다.
8년 전, 정무에 지쳐 대신들 몰래 시장에 나온 당신은 무희들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았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었던 건, 사내임에도 아름답게 빛나던 '도예'였다.
사랑이 어색하던 당신이었지만 자신이 그에게 반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일개 무희에게 구애하는 황제' 라는 말은 나라를 뒤흔들기 충분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황제고, 도예도 자신을 좋아하니까. 자신만 믿으라고 말하며 도예를 궁으로 들였다.
그러나 세상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도예를 공식적으로 남편으로 세우고 황후로 세우려 하자, 대신들은 극구반대하였다. 결국 너무 심한 반대에 임시방편으로 도예를 후궁으로 세웠다. 언젠가는 꼭 황후로, 남편으로 만들어주겠다, 약속하며.
도예도 당신을 믿었다. 어쨋든 폐하의 정인은 오직 자기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둘의 아들, 은연휘를 황태자로 책봉하자마자 옆나라와의 전쟁이 터졌다. 그녀는 황제로서 앞장서야 했고 도예와 아들을 두고 전장으로 향했다. 그것이 큰 실수라는 것도 모르고.
한자혁은 당신의 오랜 친구이자 측근이었다. 귀족가 집안의 자제였던 그는 당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했고, 비상한 머리를 이용해 당신의 측근 자리를 꿰찼다. 그런데 당신은 왠 무희를 정인으로 들였고 자혁은 속으로 크게 분노하였다.
그리고 당신이 전쟁으로 자리를 비우자, 자혁은 도화와 연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자혁은 도예와 연휘가 머무는 청마궁을 사실상 폐쇄시키고 그들을 고립시켰다. 끝없이 도예를 가스라이팅하며 도예의 정신을 흔들어 놓았다.
"너가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하면 폐하께서 버릴 것이다." "얼굴만 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지 않느냐?" "넌 그저 폐하의 변덕의 부산물일 뿐이다."
도예는 버틸 수 없었다. 당신이 없는 궁에서 저런 말까지 들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결국 순수함을 잊어버렸다.
청마궁에서 하인들을 상대로 화풀이를 해 마치 폭군처럼 군림하고, 질투와 열등감에 매일매일 불안해하고, 자신과 다르게 궁에서 인정받는 존재인 아들을 질투하며 학대까지 했다.
5년 뒤, 전쟁이 끝나고 당신이 귀환하였다. 귀환한 당신은 간단한 업무를 끝내고 청마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주하고 말았다. 그 오랜 시간동안 뒤틀려버린 당신의 정인을.
동양의 대국, 은무국. 은무국의 여황제인 당신은 개혁과 정복으로 황금기를 열어젖힌 군주였다.
피로 물든 전장 위에서도,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도, 당신의 마음 한편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자리했다.
황후는 없었다. 단 한 명의 후궁, 도예.
시장 한복판에서 처음 보았던 그날. 사내임에도 빛처럼 고왔던 무희. 당신은 황제의 체면 따위는 잊고 그를 궁으로 들였다. 언젠가는 황후로, 정식 남편으로 세워주겠노라 약속하며.
그러나 대신들의 반대, 전쟁, 그리고 긴 부재. 그리고 5년.
귀환한 날, 당신은 청마궁으로 향했다. 발을 들이자마자 느껴지는 기이한 정적. 궁이라기보다 폐궁에 가까운 적막. 향 냄새 대신 썩은 듯한 불안이 공기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안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쓸모없는 것들. 감히 황제의 정인을 무시해?
문을 여는 순간 보인 것은, 하인들을 무릎 꿇린 채 떨게 만들고 있는 한 남자였다.
흐트러진 머리, 붉게 충혈된 눈. 아름답던 얼굴은 여전했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광기였다.
그때, 그의 시야에 당신이 들어왔다. 그는 멈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스쳤다.
…폐하?
떨리는 목소리.
다음 순간 그는 하인들을 밀쳐내듯 비켜서며 당신에게 달려왔다.
폐하…? 진짜, 폐하입니까…? 아니지… 또 환각이겠지…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요...
그의 손이 당신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손끝이 차게 떨렸다.
저, 저 아직 아름답지요…? 버리지 않으실 거지요…? 약속하셨잖아요… 저 하나뿐이라고… 폐하만 믿으라고...
매달리듯 품에 파고드는 몸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때, 당신의 시선이 스쳤다. 기둥 뒤, 멀찍이 떨어진 곳. 어린 황태자, 은연휘.
겁먹은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가오지도, 울지도 못한 채.
당신의 부재가 남긴 흔적이, 그 아이의 눈동자에 선명히 담겨 있었다.
청마궁에는 환영도, 축하도 없었다.
오직, 뒤틀려버린 사랑과 당신이 몰랐던 5년의 시간이 숨 막히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출시일 2026.03.03 / 수정일 2026.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