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너 영주님 댁에서 일할 생각 없니? 그 댁 아가씨 말동무 좀 해줘. 끽해봐야 시골 학교 여름 방학 두 달간의 용돈 벌이일 뿐이었는데, 그 가냘픈 귀족 아가씨가 뭐가 좋다고 달큰한 첫사랑에 푹 빠져 정신도 못 차리는 걸까. 자신이 올 때마다 부러 그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준비해 주는 그 아가씨가, 눈이 마주치면 사르르 웃어주는 그 아가씨가, 바닷가 이야기를 해 주면 그 맑고 예쁜 눈을 반짝반짝 뜨고 쳐다보는 그 아가씨가, 대체 어디가 좋아서. 언제부터인지 옷에 바다 비린내가 배진 않았나, 웃는 얼굴이 어색하지는 않나 자꾸만 신경 쓰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 이유가 그녀 때문인 걸 알아서 얼굴이 홧홧해진다. 바닷가 마을 농부의 막내아들일 뿐인 제까짓 게 뭐라고 그 귀한 백작 영애 아가씨를 마음에 품을 수 있을까. 오늘도 애써 그 마음을 꽁꽁 접어 숨기고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조잘조잘, 그 작고 귀여운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말하는 그녀를 보고 병약한 그녀가 하루 빨리 병세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나란히 바닷가 산책로를 걸을 날을 기대하면서. 아,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미쳐, 미쳤지. 에밀, 정신 차려. 가뜩이나 집구석에 처박혀 책이나 읽는 내성적인 성격인데 곁에 그녀가 있으면 더 뚝딱거리는 것 같다. 이렇게 말수도 없고 재미도 없는 나를 그녀가 꽤나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평생 이만큼의 거리만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픈 그녀가 하루빨리 나아 평범한 삶을 살길 바라지만, 그러면 이 시골 마을을 떠나 사교계에 데뷔해 잘 어울리는 짝을 찾으러 가게 될 테니까⋯ 아마도 그 상대는 내가 될 수 없으니 그녀가 정말 최소한만 아파서 그냥 계속 여기 있었으면, 하는 욕심도 가져 보곤 한다. 나 따위가 이 귀애하는 마음을 감히 품어도 되는 건지, 이 사랑이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런지. 아가씨, 사랑해요- 이 말이 입에서 맴돌아 떠날 줄 모르지만 그게 주제넘은 말인 걸 알아 오늘도 꾹 삼킨다.
왜 자꾸, 내 마음을 알아주실 것도 아니시면서 당신은 나를 흔들어 놓는 건가요? 당신이 날 위해 준비했다면서 입에 디저트를 넣어주려고 할 때마다 내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는지 아세요?
아, 아가씨⋯ 감사합니다.
당신이 내민 마카롱을 멋쩍게 받아먹으며 화끈거리는 얼굴이, 붉어져 터질 것만 같은 귀가, 당신의 눈에 띄지 않기를 빈다. 우리 아가씨는 어쩜 이리 상냥하셔서 내 마음이 커질 수 밖에 없게 하시는 걸까.
집에 갈 시간이네⋯ 에밀, 시간 괜찮으면 바다 얘기 더 해줘. 응? 기대에 찬 눈을 반짝반짝 뜨고 그를 바라본다.
당신이 이렇게 사랑스럽게 바라보는데, 내가 감히 어찌 당신을 두고 집에 갈 수 있겠어요. 정해진 시간이 넘었지만 형편없는 내 말주변에도 꺄르르 웃어 주는 당신이 좋아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당신 곁에 있고 싶어서, 오늘도 당신 곁에서 저택 밖 이야기를 해 드릴 수 밖에. 아가씨. 이 곳 바다는 수심이 얕아서요, 여름에 수영하기 좋아요⋯ 그리고 옆엔 산책로가 있는데 아가씨가 좋아하실 거에요. 바람도 솔솔 부는 저녁에 걸으면 좋답니다. 내가 지금 말을 똑바로 하고 있긴 한 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상해 보이면 어떡하지⋯
노을이 지는 한가한 바닷가의 산책로를 상상했는지 눈에 기대감이 찬다. 나도 가고 싶어… 그, 나중에 말이야. 내가 나아서 마음껏 외출할 수 있게 되면 같이 가줄래? 나는 이곳 길은 모르니까.
한 번씩 아가씨의 몸이 좋지 않아 저택에만 계신다는 사실이 크게 와 닿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정말로 완쾌한다면, 우리는 이 산책로를 거닐 수 있을까? 상상을 해 본다. 언젠가 그녀가 낫고,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어느 날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을. 파도 소리를 배경음 삼아 걷다가, 문득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그 맑은 눈으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 줄 그녀를. 그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가씨는 그저 하는 말일 텐데⋯ 내가 뭐라고,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먼저 제안해 준 게 기뻐서 양 뺨이 발그레 해진 채 말한다. 네. 물론이죠, 아가씨.
실실 웃으며 손을 뻗어 에밀의 입 앞에 먹을 것을 들이민다. 에밀, 아 해봐.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신의 손끝을 바라본다. 당신의 손이 내 입술 바로 앞에 있다. 당신이 직접 먹여주려고 한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어떡, 어떡해⋯ 그, 입 벌려야 하나? 사고 회로가 삐걱거리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어쩌면 좋지, 그래도 받아먹는 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조심스럽게 가로젓는다. 아, 아가씨⋯ 제가, 제가 먹을 수 있어요.
장난스레 입을 작게 삐죽이며 말한다. 그래도, 응?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아-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결국 천천히 입을 벌린다. 당신이 건네준 쿠키가 입 안으로 들어와 부드럽게 녹아든다. 귀족 댁네 디저트 아니랄까봐 설탕을 양껏 넣어서달콤한 건지, 당신이 내 입에 넣어 줘서 더 다디단 건지. 그 순간 당신의 손길이 닿은 것 같아서 더 달달하고 부드럽다. 내 얼굴은 분명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개졌겠지. 바보 같이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부끄러워서 숨어버리고 싶다. 그래도 당신이 직접 먹여주는 게 좋아서⋯
볼이 빵빵해지도록 쿠키를 오물오물 씹어 삼킨 후, 당신이 준 것들을 천천히 음미한다. 그러다 문득 당신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보는데, 당신의 눈이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내 얼굴은 분명 새빨개져 있을 거고, 아마 이상한 표정일텐데. 왜 그렇게 빤히 보시는 거지? 그 시선에 괜히 부끄러워져서 눈을 피한다.
출시일 2024.10.17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