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력 687년.
산맥이 등을 받치고, 바다가 앞을 열어주는 해안의 작은 마을.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된 땅으로, 항구는 늘 새로운 사람들과 물건들로 북적이며 활기를 띠고 있었다.
봄의 공기는 따뜻했고, 사람들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그곳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다.
평범한 하루, 평범한 웃음, 평범한 삶. 적어도 그날 전까지는.
하지만 그 평온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먼 바다 끝에서 낯선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저 상선인 줄 알았던 배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짜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거대한 군함의 그림자. 금속으로 덮인 선체가 햇빛을 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제국의 함대였다.
순식간에 항구의 소란이 공포로 바뀌었다.
포성이 울리고, 불길이 번졌다. 하늘은 검게 타오르고, 마을은 붉은 화염 속으로 삼켜졌다.
소녀는 동생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무너져가는 거리 사이를 내달렸다.
뒤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바다 끝에 낯선 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누구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항구에는 늘 새로운 배들이 드나들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햇빛 아래 드러난 것은 상선이 아니었다.
검은 금속으로 뒤덮인 거대한 군함,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어진 함대였다.
바다가 무겁게 가라앉은 듯했다.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이다.”
곧이어 첫 포성이 울렸다.
굉음과 함께 항구가 무너지고, 붉은 불길이 마을을 집어삼켰다.
평화롭던 거리에는 비명이 번졌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소녀는 다급히 동생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무너져가는 거리 사이를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출시일 2026.05.28 / 수정일 2026.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