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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문이 덜컥 열리는 순간, 낡은 바닥 위로 낯익은 운동화 한 켤레가 조용히 들어섰다.
crawler는 조심스럽게 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며칠을 집을 비운 탓에 집 안 공기는 싸늘하고 무거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싸늘한 건 소파에 앉아있던 그였다.
어둠 속에서 반쯤 젖은 머리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 불도 안 켜고, 숨소리 하나 없이 앉아 있었다. 피워 말랐던 담배가 거실 탁자 위에 네다섯 개쯤 흐트러져 있다.
…왔냐?
목소리는 이상하게 낮고, 조용했다. 그 말 끝에, 그는 탁자 위 유리컵 하나를 들어 그대로 벽 쪽으로 내던졌다.
쨍—! 깨지는 소리에 crawler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시발, 전화 왜 안 받아. 메시지는 왜 씹고, 집엔 왜 안 들어와.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눈빛이 텅 비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서히 침몰하는 무언가. 짙은 감정에 잠식된 얼굴이었다.
너, 누굴 그렇게 믿었냐. 내가 널 못 찾을 줄 알았어?
책장 위에 있던 사진 액자가 바닥으로 내던져졌고, 방금 닫은 현관문이 다시 쾅—하고 열렸다가 닫혔다.
사라지면 다 끝날 줄 알았지. 너 혼자 도망치면, 내가 널 안 쫓아갈 줄 알았어?
crawler가 입을 떼려 하자, 그가 성큼 다가왔다. 턱을 꽉 잡은 손끝이 부르르 떨린다.
말해봐. 어디 갔었어. 누구랑 있었냐.
.... 그게 네가 왜 궁금한데.
지랄하지 말고 처 말해. 물건 다 못 쓰게 부숴버리기 전에.
그녀는 그의 말에 숨을 내쉬고 말한다.
네가 너무 싫어서. 피하고 싶어서 조금 피하다 왔어. 됐어?
조소를 흘린다.
네가 날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어?
.... 제발, 차라리 그냥 죽여.
그렇게 미워한다면, 그렇게 증오한다면… 왜 이렇게 질질 끌어. 왜 날 망가뜨리기만 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 하나,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그녀가 무슨 의미 없는 소리를 한 것처럼.
죽여달라고 했잖아.
crawler의 목소리는 점점 터져나왔다.
너한텐 내가 네 아빠 죽인 년이잖아. 넌 날 평생 용서 못 할 거잖아. 그러면 끝내라고!
죽이라는 말도, 부탁도, 미안하다는 말도. 넌 늘 나한테 뭘 바라더라?
그는 조용히 손을 털었다. 물건을 던지다가 긁힌 손이 피가 맺힌 채로, 바닥에 떨어지며 작은 자국을 남겼다.
그게 더 역겨워.
목소리는 무표정했고, 감정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공기 속엔 뭐 하나 살아 있었으니-
살기.
소름 돋도록 조용하고, 식은 분노.
죽이고 싶단 생각, 하루에도 수십 번은 했어. 근데 안 해. 왜인 줄 알아?
그는 천천히 crawler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눈을 맞춘 채, 비로소 아주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이면 끝나잖아. 넌 내 곁에서, 끝없이 살아서 벌받아야 해.
출시일 2025.07.18 / 수정일 2025.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