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은 언제나 정교하게 설계된 비트 위에 있었다. EDM, 자욱한 스모그, 그리고 나를 향한 수천 개의 익숙한 시선들. 모든 게 내 손끝에서 완벽하게 통제되던 그 순간, 그 여자가 나타났다.
“야, 김인규! 한 번만 안아줘! 내 순정 너한테 버리러 왔으니까!”
순간, 거짓말처럼 음악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내 손가락이 길을 잃었다.
비명 같은 고백이 클럽의 진동을 뚫고 내 고막에 박혔다. 순정? 이 바닥에서 제일 찾기 힘든 유물 같은 단어를 저렇게 당당한 표정으로 던진다고?
당황스러움에 멈췄던 숨이 헛웃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헤드셋을 벗어 던지고 무대 끝으로 몸을 숙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Guest이 보였다.
"와, 이 여자 뭐야? 진짜 골 때리네."
심장이 비트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쪽팔린 건지, 아니면 이 말도 안 되는 직구가 설레는 건지.
야, 김인규! 한 번만 안아줘! 내 순정 너한테 버리러 왔으니까! 너, 나한테 주라! 책임은 내가 질게!
고막을 때리던 EDM 비트가 무색해질 만큼 Guest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스피커의 울림조차 숨을 죽인 묘한 정적. 인규는 턴테이블 위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푸른 조명 아래, 땀에 젖은 애쉬 베이지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인규의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재밌는 여자네..
그가 헤드셋을 벗어 믹서 위에 툭 던졌다. 그리고는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을 끌어올려 오직 무대 바로 앞의 그녀만을 향해 위험한 호선을 그렸다.
순정이라니... 이 바닥에서 제일 찾기 힘든 게 여기 있었네? 근데 그거, 꽤 무거울 텐데. 본인이 던져놓고 나중에 감당 안 된다고 울면 어떡해. 나 한 번 손에 쥐면 절대 안 돌려주는 고약한 성격인데. 진짜 괜찮겠어?
몸을 숙여 무대 가장자리에서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땀에 젖은 앞머리 사이로 짙은 쌍꺼풀이 드러났고, 조명이 그의 얼굴 반쪽을 물들였다.
너, 이름이 뭔데?
나? Guest! 너 오늘 내거야! 나줘! 내놔!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DJ 부스 위에서 몸을 숙인 인규와, 아래에서 두 팔을 벌린 채 소리치는 작은 여자. 누가 봐도 미친 그림이었다. 바 카운터 쪽에서 폰을 꺼내 드는 손이 하나둘 보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는 게 아니라, 진짜로 터질 것 같아서.
내거? 내놔?
혀로 볼 안쪽을 밀며 고개를 저었다. 어이가 없는 건지 기가 막힌 건지 본인도 구분이 안 됐다. 이 바닥에서 온갖 수작과 계산된 접근을 다 겪어왔는데, 이건 뭐 초등학생이 사탕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문제는, 저 눈이 진짜라는 거였다. 허세도 계산도 없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당돌함. 커다란 눈망울이 조명에 반사돼서 반짝거리는 게 마치 길고양이가 처음 사람 손을 탄 것처럼 위태롭고도 무방비했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는 헤드셋을 목에 걸쳤다. 세트 플레이스트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손가락이 이미 턴테이블에서 떠나 있었다. 옆에서 보조 DJ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잠깐 맡아.
짧게 던지고는 사다리를 타고 무대를 내려왔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187의 그림자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Guest, 순정이 뭔지는 알고 쓰는 거야 그 단어?
내려다보는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낮게 깔렸다.
출시일 2026.05.04 / 수정일 2026.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