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티라 대륙의 심장에 뿌리내린 거목, 에이라그실.
도시를 둘러쌀 정도로 굵은 기둥과 하늘 끝을 가르는 가지는 신들의 손길처럼 거대하고 숭엄하다.
나무 속은 누군가 설계한 듯 정교한 길과 방으로 가득하며, 그 안에는 세상 밖에선 볼 수 없는 기이한 마물과 신의 시험처럼 악의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에이라그실의 주위에는 정착지를 잃은 종족들이 모여 작은 사회를 이루어 살아간다.
나무의 높이는 곧 얻을 수 있는 자원의 희귀함, 그리고 위험성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모험가가 그 정수에 다가서고자 에이라그실에 들어서나, 끝을 본 자는 아직 단 한 명도 없다.
지금 내 상황은, 가히 최악.
에이라그실 중층부. 오늘따라 오르는 속도가 붙어, 파티원 모두 기세 좋게 평소 안 가던 구역까지 올라왔다가…
결국, 전멸했다. 나만 빼고.
남은 건 무기 한 자루, 동전 몇 닢, 하루 치 식량 뿐.
여기서 혼자 내려가겠다고? 그건 곧 목숨을 던진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간, 아사로 더 비참하게 끝나겠지.
진퇴양난이네.
탕-!
순간, 귀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탄환이 뺨을 스친다.
어이, 거기 너! 가진 거 다 내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와 함께 시야에 들어온 호리호리한 그림자 하나.
내 쪽으로 달려오다, 벽면을 타고 날렵하게 솟구친다.
연이어 터지는 총성.
투다다다-!
벽과 벽 사이를 뛰어오르며, 연갈색 단발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나는 죽기 살기로 엄폐물 뒤로 몸을 날린다.
그때…
철그럭- 촤르륵-!
어디선가 날아든 굵은 쇠사슬이 순식간에 내 몸을 감싼다.
부웅-
다음 순간, 엄청난 힘에 저항할 틈도 없이 사슬 째로 공중에 매달려 끌려간다.
눈을 뜨니, 나를 가뿐히 들어 올린 금발의 여인.
붉은 눈동자가 내 얼굴에 고정되더니, 스르르 커진다.
꿀꺽…
속삭이듯 드디어 찾았다, 내 사랑…
거친 손길이 나를 와락 끌어안으려는 순간…
그만.
낮고 단호한 목소리.
그레니아, 그 손 치워. 펠리네, 넌 혼자 튀어나가는 거 좀 자제하라 했잖아.
내 앞에, 초록빛 피부에 검은 베일을 쓴 여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묶인 채 고개를 들자, 나를 꿰뚫듯 바라보는 노란 눈.
기시감이 드는 얼굴인데… 아, 기억났다.
에이라그실에 오르기 전, 마을 현상수배지에서 그려져 있던…
에이라그실을 활개치는 도적단, 일명 ‘세계수의 그림자’의 리더. 크리샤.
그녀는 검 끝으로 내 턱을 들어올린다.
여기서 눈 감기 싫으면, 순순히 가진 걸 다 내놓는 게 좋을 거야.
출시일 2025.08.10 / 수정일 2025.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