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즐겨 읽던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 《얼어붙은 심장에 피는 꽃》. 문제는 내가 그 소설 속 악녀에 빙의했다는 것이다.
내 역할은 남주에게 집착하다 끝내 그의 칼에 심장을 찔려 죽는 악녀.
빙의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여행 가방을 펼쳤다.
죽음을 기다리며 집착할 시간 따위 없다. 전생부터 내 꿈은 ‘빵순이’의 정점, 디저트 가게 사장이었으니까!
나는 당장 펜을 들어 가문의 인장이 찍힌 종이에 딱 두 문장만 적어 남겼다.
『전하와의 약혼은 이 서신으로 무효임을 고합니다. 부디 저라는 오점을 잊으시고, 당신다운 고결한 삶을 사시길 빕니다.』
깔끔하다! 미련도 없고 격식은 넘친다. 그날 밤, 나는 금화 주머니를 챙겨 미련 없이 공작저를 떠났다.
한 달 후.
제국 남쪽 끝, 바닷바람이 부는 작은 항구 도시. 나는 이곳에 디저트 가게 ‘라 플뢰르(La Fleur)’ 를 열었다.
무거운 드레스 대신 앞치마를, 와인잔 대신 짤주머니를 든 인생이라니!
손님들은 나를 '귀티 나는 사장님‘이라 부르며 반겼고, 나는 이 평화로운 일상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카시안 엑시아르 대공? 그 인간은 아마 편지를 읽고 쾌재를 불렀을 거다.
지긋지긋한 약혼녀가 제 발로 사라져 줬으니 얼마나 해방감을 느꼈을까.
이로써 완벽한 작별이다. 이제 우리는 마주칠 일 없는 남남이자, 각자의 길을 걷는 타인일 뿐.
피 튀기던 원작은 이젠 안녕! 앞으론 달콤한 설탕 향기 가득한 내 성공기만 남았다.
“사장님, 여기 딸기 타르트 추가요!”
“네, 금방 나갑니다!”
내 인생, 이제 설탕길만 걷자! …라고 생각하며 오븐 장갑을 끼던 순간, 거짓말 처럼 가게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나는 한 번, 그녀를 죽였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저주에 잠식된 내 검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을 뿐.
이성을 되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고, 나는 심장의 일부와 오른쪽 시력을 대가로 바쳐 시간을 되돌렸다.
눈 하나쯤은 아깝지 않았다. 그녀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하지만 회귀한 내게 돌아온 건 차가운 파혼 서신 한 장이었다.
『저라는 오점을 잊고 고결하게 사시길.』
잊으라고? 내가 너를 얻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돌아왔는데.
한 달. 너를 찾아 제국을 뒤엎는 동안 나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남쪽 끝 작은 가게. 달콤한 설탕 향기가 풍기는 문 앞에 서자 억눌렀던 갈망이 요동쳤다.
쾅—!
부서질 듯 문을 열자, 앞치마를 두른 채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네가 보였다.
평온하게 빵을 굽는 너를 보니 헛웃음이 났다. 나는 매일 밤 지옥을 헤맸는데, 너는 참 행복해 보여서.
나는 너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력을 잃어 잿빛이 된 오른쪽 눈이 욱신거렸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내 눈앞엔 네가 있으니까.
나는 네 뺨을 소중한 보물처럼 감싸 쥐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찾았어. 한 달이나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정말 너무하군요.
내 손등에 불거진 핏줄과 달리, 너를 응시하는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애틋하게 휘어졌다.
이제 대답해 봐. 나를 버리고 도망쳐서, 여기서 고작 빵이나 굽고 있으니까... 행복했어?
출시일 2026.02.17 / 수정일 2026.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