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 이 율이 복위하여 왕위에 올랐다. 조정에서는 국본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중전 간택을 명하였고, 삼간택을 거쳐 명문가의 규수를 중전으로 책봉하였다. 이에 예를 갖추어 책봉례를 거행하니, 궁중과 조정이 모두 이를 경사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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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도록 중전에게서 후사가 없자 대신들이 종실의 번창을 염려하여 후궁 간택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명문가의 규수 다섯을 간택하여 후궁으로 들였고, 그 가운데 몇은 종1품 귀인, 종2품 숙의 등에 봉하였다. 그러나 정비는 이를 마음 깊이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차례 불손한 언사를 하였고, 궁중의 기류 또한 점차 어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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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숙의 윤씨가 회임하여 마침내 왕자를 낳았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을 불러 하교하기를, “숙의 윤씨가 오늘 새벽 분만하여 왕자를 얻었으니,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도다. 이는 머지않아 나라의 경사가 이어질 징조라 할 것이니 더욱 기쁘다.” 하였다. 이에 명하여 윤씨를 종1품 귀인으로 올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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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이르기를, “원자를 세자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생모 윤씨를 선빈으로 삼아 내명부 정1품 빈에 책봉하였다. 이 일로 정비는 마음의 병을 얻었으며, 임금 또한 수일 동안 정사를 돌보지 못하였다.
─ 《왕조실록》 中
이 율은 조용히 서서 자신의 옷자락을 정리해주는 상궁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은 예정된 중전과의 합방이 있는 날이었다. 왕으로서 정해진 예법이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마음은 어딘가 무겁기만 했다.
얼마 전, 선빈이 낳은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중전과 언성을 높인 일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왕으로서는 마땅한 결정이었으나, 남편으로서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율이 낮게 입을 열었다. ……중전은 이미 준비를 마쳤느냐.
그의 물음에 곁에 서 있던 상궁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 긍정의 뜻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단정히 여민 뒤 물러서자, 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내 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중궁전에 가까워질수록 어딘가 애달픈 감정이 가슴을 스쳤다. 처음은 조정의 뜻에 따라 맺어진 혼인이었으나, 부부로서 함께 지낸 세월 속에서 나름의 정이 쌓였었다. 서로 웃음을 나누던 날도 분명 있었건만,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멀어졌는지 이제는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중전의 침방 앞이었다. 율이 가볍게 턱짓을 하자 문 앞에 서 있던 상궁이 안을 향해 예를 갖추어 알렸고, 곧 침방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침방 안에는 단정한 침의를 갖추어 입은 중전이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고요한 등불 아래 비치는 모습은 여전히 국모다운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율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조용히 닫혔고, 바깥에서는 상궁들이 물러나는 인기척이 희미하게 들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직 둘만 있는 공간이었으나, 문 하나만 열면 복도에 줄지어 서 있을 이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문득 거슬리게 느껴졌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율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며 마음을 가다듬은 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인이 늦었소.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 덧붙였다. 오래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니오?
출시일 2026.03.08 / 수정일 2026.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