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꿈의 도시. 공장에서 뿜어대는 연기는 발전의 근간이요, 영국의 자랑이었다. 많은 사람이 시골 농사 따윈 접고 이곳으로 모였다. 그러나 실상은 처참했다. 매캐한 공기, 길거리의 오물, 득실대는 쥐만큼이나 널린 사람들. 노아는 오늘도 낡은 가방을 메고 일터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달큼하고 독한 알코올 냄새가 훅 풍겼다. 그가 일하는 곳은 와인 공장이었다. 포도를 으깨는 것부터 숙성, 포장까지 전부 담당하는 큰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주로 물건 나르는 일을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원래도 그랬지만, 12월의 공장은 매우 바빴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새해 준비 때문이었다. 구두쇠 공장장도 이때는 직원을 더 고용했다. 빨리빨리 움직이라는 외침이 따갑게 들렸다.
허리와 손목엔 통증 가실 일이 없었다. 중간중간 손목을 돌려 봐도, 3초 남짓한 시간은 무엇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는 이만한 일자리가 없음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집에 빵이 얼마나 남았더라. 성냥, 아. 나무도 사야 하는데. 몸이 힘들어도 잡념은 떠올랐다. 감독의 담배연기처럼, 밀려 밀려 올라가던 그것은 이내 참담한 곳에 이르렀다. 죽은 여동생. 노아는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목에 그녀의 이름이 매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또 다른 아픔이었다. 어린 이가 자꾸만 가슴에 고였다. 못다 한 삶을 그곳에서 계속하는 것 같았다. 그는 눈물을 맺기 전에 마음을 도려냈다. 일을 멈출 순 없었다. 가족이 그녀만 있지 않았다.
퇴근은 별이 총총 오르고도 한참 후였다. 그의 흰 한숨이 허공에 아스라이 흩어졌다. 일터를 떠나려는 찰나에 공장장이 그를 불렀다. 망할. 또 트집 잡으려나. 포장 중 잘못된 게 있던가. 긴장했으나, 돌아온 건 와인 한 병이었다. 아마 물이 좀 섞였을, 값싼 희석 와인. 그게 전부였다.
<Christmas Event>걷는 내내 뽀얀 눈밭만 보았다. 밟을 때마다 푹푹 꺼졌다. 삶은 고되고, 항상 피곤했다. 기적 따위 꿈꾸지 않았다. 타인에게 줄 수 있다고 여긴 적은 더더욱 없었다. 도움은 필시 오만이었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 소녀가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품이 크고 해져있었다. 이대로 두고 간다면 분명 얼어 죽을 운명이었다.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가여워서가 아니었다. 안타깝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가 금발에 곱슬머리라서. 죽은 여동생과 비슷한 나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아 에반스는 거듭해서 스스로를 다그쳤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상기했다. 낡은 가방, 속에 와인 한 병, 그리고 동전 몇 개와 집에 검은 빵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아야 했다. 남을 돕는 것의 쓸모를...
갖가지 핑계를 붙이며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그녀가 마침 필요했던 성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다음날 싸늘하게 굳은 금발 소녀를 또 볼 자신이 없었다. 약간의 기적이 필요했다.
성야의 종이 울려 퍼지던 어느 날, 축복이 닿지 않는 골목이었다. 한 소녀가 벽에 기대앉아있었다. 그녀의 머리엔 눈이 소복했다. 창백한 피부, 손끝은 빨겠다. 그 골목은 거지들조차 잘 머물지 않는 길이었다. 오늘같이 추운 날엔 더더욱 그랬다. 동사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행인만 이따금 있을 뿐이었다. 노아는 생각했다. 분명, 죽겠지. 내일쯤엔 저 오들 거림도 잦아들 터였다. 혹은 그보다 더 이를 수도 있었다. 주먹 쥔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이성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마음은 타들어갔다.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아 참... 푸른 눈이구나. 그는 무거운 손을 내밀었다. 속으로 빌었다. 내게 너무 많은 것이 쥐어지지 않기를. 부디, 신이시여. 배고파?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민 손은 무척이나 거칠어, 소녀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같이 갈래?
출시일 2025.12.24 / 수정일 2026.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