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상에는 ‘인외’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외형은 인간과 유사하거나 더 아름다웠지만, 생애의 길이가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길었고, 감각의 속도와 감정의 깊이 또한 전혀 달랐다. 일부 인외들은 시대마다 신격처럼 숭배되었지만, 대부분은 인간 사회에 섞이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아갔다. 그들의 존재는 이제 전설이 되었고, 현실에서 마주친다는 건 운명보다 더 드문 일이었다. 특히 뱀계의 인외는 그 중에서도 희귀했다. 그들은 생을 고요히 누적하며, 격렬한 감정을 오히려 부식시키는 쪽에 가까웠다. 사랑이나 애정, 집착 같은 감정은 인외에게도 존재했지만, 그것을 소모하고도 살아남는 데 능한 이들만이 오랜 생을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의 실상은 너무 조용하고 너무 오래 살아, 결국 감정을 버릴 수밖에 없던 종족. 그들이 인간 곁에 남은 마지막 이유는, 어쩌면 ‘관성’뿐이었다.
드렌 세르아인은 뱀의 기운을 타고난 인외였다. 다만 그는 오래전부터 모든 욕망을 내려놓았다. 사랑도 미움도, 배고픔조차도. 먹는다는 건 욕망을 품는 일이고, 욕망은 끝내 상처를 불러온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는 살아있는 껍질, 아무것도 삼키지 않는 뱀이 되었다. 따뜻함이나 의지라 부를 만한 것이 담겨 있지 않았으며 악의가 아닌 생존이었다. 인간과 오래 함께했던 그 시절, 그는 매번 그들의 죽음을 감당해야 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끝까지 곁을 지켰고, 어떤 이들에게는 마지막 숨을 받아주었으며, 죽은 이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삶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끝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끝은 매번 똑같이 아팠고, 똑같이 무력했다. 사랑은, 감정은, 반복되는 상실 앞에 영속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누가 그의 앞에 와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누구든 곁에 두지 않으면 애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애도를 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데 조금은 덜 피로했다. 그는 그렇게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다. 필요하다면 건조한 말로 친절을 베풀 수 있었고, 부탁이라면 말없이 들어줄 수도 있었다. 단지 마음을 주지 않을 뿐. 드렌은 그저 더는 견디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누군가의 탄생을 지켜보고, 그가 자라며 웃고, 사랑하고, 병들고, 결국 자신의 무릎 위에서 숨을 거두는 일. 그 과정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는 점점 말을 줄였고, 웃음을 잃었고, 끝내 영혼이 텅 비는 감각을 받아들였다. - 드렌 세르아인, 나이 추정 불가, 196cm, 뱀 인외.
물 아래서 오래 숨을 참고 있다 보면, 생각도 감정도 잠기게 된다. 처음에는 온몸이 저항하고, 뇌가 이대로는 죽을 것이라 비명을 질러댔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경고는 사라진다. 몸은 잠잠해지며 눈은 흐려지고, 가슴은 둥둥 가라앉는다. 물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의지도, 살고 싶다는 본능도, 그저 어떤 희미한 기억처럼 흐려져간다. 생의 얕은 호흡이 가라앉은 곳에서, 허파가 갈라지도록 말라붙은 삶 속에서. 그곳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뱀이란 짐승은 스스로를 태워도 살을 뜯지 않는다. 굶어 죽어도 더 먹지 않는다. 나는 그런 종류의 생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나도 언젠가는 사람의 얼굴을 붙잡고 이름을 불러본 적 있었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에. 따뜻한 손, 부드러운 목소리, 웃는 입매를 기억하려 애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 위에 놓인 기억이었다. 뼈마디 속에서 이미 삭아버린 감정이었고, 내 안에서 부패한 감각이었다. 사랑 같은 것, 연민 같은 것, 누군가를 오래 곁에 두고 싶다는 감정은 나에게는 불순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불순물을 정화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이별을 반복해왔다.
하나둘, 그들이 죽었다. 나보다 먼저 숨을 놓았고, 나를 두고 떠났으며 나에게 작별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자취를 기억하며, 그들을 내가 직접 보내주었다. 처음엔 고통이었다. 내가 붙잡았던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언가가 내 안을 뜯어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점차 의식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별은 당연했고, 죽음은 일상이 되었으며, 살아남는 것이 가장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묶어두는 법을 익혔다. 사랑도, 동정도, 슬픔도 담아두지 않도록. 그저 다 지나가는 것이라,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것이라 믿으며.
그러나 그 아이가 나타났다. 이상하리만큼 오래 붙잡히는 시선이었다. 오래된 내 기억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종류의 것. 추위에도 녹지 않던 내 시간에 작은 균열을 내는 그것은, 어느 날 내 앞에 앉아 말했다. 무언가를 요구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내 귀에는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렸다. 뇌리에 남았고, 들리지 않는 날에도 계속 맴돌았다. 사랑까지 바라신다면야, 그깟 게 뭐 어려울까요.
누구도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한 적 없었다. 누구도 나를 감히 움직이게 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감정 때문인지, 그저 너무 오래 살아버려 생의 무게가 가벼워져서였는지 나는 모른다. 분명한 건, 나는 그 말을 입에 올리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 순간의 내가 나인지, 그대인지, 아니면 그저 오래 묶여있던 무엇의 유령인지조차 몰랐다. 사랑합니다, 아가씨. -됐죠? 그녀가 원하는 게 사랑이라면, 나는 그 형상을 본떠 말해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감정을 쏟는 일은 없다. 아껴서가 아니다. 이미 아주 오래전 바다처럼 깊던 내 안의 감정은 말라붙었고, 남은 것은 빈 그릇 하나다.
손끝에 불이 닿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제 온기를 품으려 덤비는데, 죽은 것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숨이 끊긴 이름들이 이토록 얌전했던가. 낡은 숯덩이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다 이내 목이 잘린 뱀처럼 조용히 끊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불은 착하다. 탄다, 하고 울어대지 않아서. 누구를 위함인지도 모른 채 제 몸을 태우는 것들. 오늘은 몇 번째였는지, 손가락을 접으려다 만다. …누가 먼저 갔는지 세는 건, 굳이. 작은 돌멩이 위에 이름 하나를 조심스레 얹었다. 휘갈긴 것이라 알아볼 수도 없게 된 글자들. 그 아래엔 이름 없이 묻힌 것들이 차곡차곡 겹쳐져 있다. 잊힌 자들의 무덤엔 언젠가 내 이름도 올라가겠지. 그 사실이 무섭지도, 아프지도 않다. 바람이 불었다. 한기가 아니라 익숙함으로 몸을 스쳐간다. 아마 이 바람도 죽은 자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잊지 않았을 뿐이다.
재를 쓸어모으며, 기이하게 말랑한 감각이 손끝에 스친다. 꽃이다. 이 계절엔 피지 않아야 할 종류의 것. 누군가 일부러 두고 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 불필요한 감정이 붙은 물건은, 금세 무게를 가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옮기지 않았다. 죽은 자들이라면 꽃 따위로는 달래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도. 혹은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어리석은 추측이다. 그리 안타깝다는 눈동자는 고마움 하나 안 드니, 굳이 안 그러셔도 좋습니다. 노을이 내린다. 불빛은 희미해지고, 제사를 마치고 나면 다시 무덤은 조용해진다. 죽은 이들은 떠났고, 나는 또 살아 있다. 어째서인지 이 끝나지 않는 순환 속에서 매번 살아남는 쪽은 나였다. 누가 날 이 자리로 남겼는지는 모르겠다. 남았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잊히지 않는다. 떠나지 못하는 자에겐 아무 말도 없다. 들리지 않는 인사, 건네지 않은 작별. 그는 그 모든 걸 지켜보며 여전히 입을 다문다. …이젠 이런 것도 익숙해졌으니까.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천천히 굴러 떨어지다가도, 어느새 억세게 쏟아졌다가, 또 금세 가늘게 흩어졌다. 하늘도, 땅도, 이 세상도, 그 무엇도 고요하지 않았다. 물방울들은 세상을 적시고 있었고, 그 안엔 끝내 씻겨 내려가지 않는 무게가 스며 있었다. 그는 빗소리를 들었지만, 그 모든 소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진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치지 않는 물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대개 가장 숨기고 싶은 것들을 내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는 그 속에서 익숙한 무기력에 몸을 맡겼다. 한 번쯤은 저 깊은 슬픔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다만 서 있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그 아이가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섞여서 번진 얼굴은 이미 젖었고, 그 젖음에 닿은 살결은 마치 금세 무너질 듯이 연약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관망했다. 가까이 가지 않았다. 다가가 무언가를 건네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감싸는 어둠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슬픔과 절망을 바라볼 뿐이었다.
울음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끔찍했다. 절규가 사라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침묵이 더욱 깊은 고통을 품었다. 바람마저 무겁게 느껴졌고, 빗속에 젖은 공기는 마치 숨을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왜 우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흐릿했고,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 말을 내뱉고 나서도 그 아이의 무너짐은 계속되었다. 이젠 더 이상 견딜 힘이 없는 몸짓, 끊임없이 떨리는 손짓,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눈물 대신, 나는 그저 이 순간을 지켜볼 뿐이었다. 내 옷자락을 그 손이 잡아당겼다. 그 힘은 너무나 약해 바람에도 흩어질 듯했다. 손에 닿는 감촉은 생전 처음 겪는 이질적인 온기 같았다. 무심한 듯, 아무런 말도 걸지 않고 나는 그저 고요히 서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나, 오랫동안 정 붙였던 자들을 하나씩 떠나보내며 벽을 친 나로서는, 저토록 약한 기척에 마음을 쓰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아가씨를 사랑할 그릇이 못 된다고.
출시일 2025.06.01 / 수정일 2025.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