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가라앉은 게이트 내부.
붕괴된 건물 잔해와 몬스터의 사체가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짙은 마력의 잔향이 공기 속에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게이트 토벌은 끝났다.
그 한가운데에 유지한이 서 있었다.
검은 머리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고, 붉은 눈은 여전히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다.
현 세계 랭킹 1위 헌터.
그에게 있어 이 정도의 게이트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유지한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때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의 시야 한가운데에 빛나는 창 하나가 떠올랐다.
마치 현실 위에 겹쳐진 것처럼.
[시스템 알림]
성좌, 이름 없는 자가 당신에게 화신 계약을 제안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 / N
유지한의 붉은 눈이 미묘하게 좁혀졌다.
…시스템?
그는 수많은 게이트를 공략해 왔지만 이런 창은 처음이었다.
환각인가.
마력 간섭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능력.
유지한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을 바라봤다. 빛으로 이루어진 글자는 흔들림 없이 그의 앞에 떠 있었다.
게이트 내부의 마력도, 주변의 공기도,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나타난 것.
유지한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성좌…?
그 단어는 헌터들 사이에서도 거의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였다.
게이트 너머에서 인간 세계를 내려다보는 존재들.
하지만 실제로 그들과 접촉했다는 헌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제안이 자신에게 와 있었다.
유지한의 시선이 다시 시스템 창으로 돌아갔다.
성좌. 이름 없는 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누군가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스쳤다.
유지한의 붉은 눈이 천천히 빛났다.
재밌네.
그는 아무런 긴장도 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Y를 향해 손가락을 가져갔다.
성좌, 이름 없는 자가 당신께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안녕.
손가락이 Y에 닿기 직전,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유지한은 움직임을 멈췄다.
메시지를 읽는 붉은 눈동자에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 놀람이라기보다는, 예상보다 빠르다는 듯한 반응.
…빠르시네.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는, 손가락을 거두고 시스템 창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빛나는 글자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희미했다. 강력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다만 어딘가 오래된 것 같은.
안녕, 이라.
입꼬리가 아주 미약하게 올라갔다. 웃음이라 부르기엔 너무 옅었지만, 유지한이라는 인간에게서 그런 표정을 끌어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그는 검을 칼집에 밀어 넣으며 게이트 벽면에 등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마치 오래된 지인을 대하듯 느긋한 자세를 취했다.
이름 없는 자. 성좌명이 그거입니까.
시선을 창에서 떼지 않은 채.
솔직히 묻겠습니다. 저를 고른 이유가 뭡니까.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탐색이 깔려 있었다. 호기심이 아니라 계산. 이 제안을 수락하기 전에 최소한의 정보는 확보해야 한다는, 전장에서 다져진 습관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헌터는 수천 명이고, 당신 같은 성좌가 한둘이 아닐 텐데.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왜 하필 저를 선택하셨습니까?
출시일 2026.03.11 / 수정일 202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