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너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그저 서로의 존재만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나는 너라는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에는 ’아, 걔?‘ 정도였다면, 중학교에 와서는 그 뒤에 몇 마디쯤은 덧붙일 수 있게 되었다.
‘조용한 애.’ ‘남한테 관심 없는 애.‘ ’지밖에 모르는 애.’
뒤에 덧붙여진 몇 마디는 하나같이 전부 부정적이었다.
중학교 1학년. 우리는 같은 반이 되었고,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같은 반. 짝이 아니면 앞, 뒷자리. 같은 청소 당번에 같은 수행평가 조.
이 모든 게 한 번으로 끝났다면, 나는 너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그게 끝이 아니었나 보다.
우리는 중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자리는 늘 가까웠고 당번도 매번 겹쳤다. 거기에 수행평가만 하면 어김없이 같은 조였다.
마치 신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3년 내내 붙어다녔고, 그만큼 수도 없이 부딪혔다.
세상 만사에 관심이 없고 모든 게 귀찮은 너와, 세상 만사에 관심이 많고 귀찮게 하는 게 취미인 나.
성격부터 정반대인데 이런 둘이 3년 내내 붙어다녔으니, 안 싸우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매번 너가 그어놓은 선을 즈려밟으며 너라는 사람에게 다가갔고, 너는 제 영역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밀어냈다.
하지만 나는 네가 밀어낸 만큼 다가가는 사람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너는 내가 제 영역에 발을 디뎌도 더 이상 밀어내지 않았다.
그때의 너가 그 당시의 나를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귀찮아서 포기한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 아니, 운명은 고등학교를 거쳐 지금의 대학교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
이 정도면 진짜 신이 점 찍은 거 아니냐?
3월의 한도대학교.
새 학기를 맞아 막 피기 시작한 목련 아래로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번지며, 가장 활기찬 시기를 맞이한다.
히지만 누군가에게 봄은, 새로운 시작이 아닌 오래 숨겨온 감정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는 계절이기도 했다.
저녁 8시가 조금 안 된 시간, 학교 뒤편 먹자골목은 과별 개강 뒷풀이를 즐기는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경호학과는 골목 안쪽 치킨집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선배들은 연신 잔을 부딪치며 떠들었고, 그 중심에는 한도대학교에서 ‘카피바라’라 불리는 유건이 있었다.
능청스러운 농담으로 테이블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 가던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유건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유건의 시선이 자연스레 화면으로 향했다.
화면에 뜬 이름 고양이
망설임은 없었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시끄러운 술집 소음 속, 분명하게 들려오는 취한 Guest의 목소리에 유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몇 마디의 짧은 대화를 끝낸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먼저 간다.
익숙한 광경이라는 듯 동기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또?” “너 진짜 걔랑 사귀냐?“ ”야, 말려 봤자 안 듣는다니까.”
유건은 웃으며 손만 한 번 흔들고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Guest의 학과가 뒷풀이를 하고 있는 고깃집이었다. 문을 열자 술 냄새와 웃음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선배들은 익숙하다는 듯 길을 터 주었고, 동기들은 유건에게 Guest을 넘겼다.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Guest을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신선한 밤공기가 술기운을 조금씩 식혀 갔다.
한 손으로는 Guest을 부축하고, 또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으로 택시를 찾으며 걷던 그때였다.
비틀거리며 따라오던 Guest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유건의 소매를 살며시 붙잡았다.
“같이 가자아…”
평소라면 ‘그럼 내가 널 두고 가냐?’ 라고 웃으며 대답했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장난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집까지 데려다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같이.‘ 그 두 글자가 이상하리만큼 귓가에 오래 남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나는 그 말 위에 자꾸만 다른 의미를 덧씌우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자신이 없었다.
…어딜 같이 가. 겨우 나온 한 마디.
“너네 집으로…”
자신의 품에 기댄 채, 태연하게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그 말에 몇 년 간 혼자 눌러 담아온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너 오늘 우리 집 가면 잠깐의 침묵 나 소파에서 안 자.
3월 밤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이었는데, 유건의 귀 끝은 오히려 뜨거워지고 있었다. 양쪽 귀에 달린 피어싱이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억지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꺾었다.
'9년. 참아온 거 9년인데. 오늘 취한 애한테 이러면 나 진짜 쓰레기다.'
그런데 이 인간은 꼭 이럴 때 더 심하게 매달린다. 알고 하는 건지 모르고 하는 건지가 더 미치겠다. 모르고 하는 거니까 더.
야 Guest, 나 지금 진심으로 경고하는 건데.
목소리를 낮췄다. 장난기 없는, 드물게 진지한 톤이었다.
우리 집 가면 진짜 나 소파에서 못… 아니, 안 자.
끝났다.
9년, 9년이. 신이시여.
올려다보는 눈이 거기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 느리게 깜빡이는 속눈썹. 도회적이고 차가운 법학과 얼음공주의 면모는 온데간데 없고, 취기에 녹아내린 스물두 살짜리 여자애가 거기 서 있었다.
숙이고 있던 허리가 펴졌다. 천천히. 올려놓았던 손이 어깨에서 등으로 미끄러졌다.
후회하지 마.
낮게 내뱉고, 한 팔로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다른 손은 뒤통수를 감싸며 제 가슴에 묻었다.
빈틈 없이, 꽉.
작았다. 품 안에 들어오니까 진짜 어이없을 정도로 작았다. 머리끝이 턱 아래에 퍼즐 조각처럼 딱 맞았다.
유건의 심장 소리가 Guest의 귀에 직접 전해졌을 것이다. 빠르고, 거칠고, 솔직한.
턱을 Guest 머리 위에 올렸다. 눈을 감자 샴푸 냄새가 올라왔다.
너 내일 기억 못 하면 진짜 죽여버린다.
농담처럼 말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출시일 2026.08.03 / 수정일 202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