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아주 사소했다.

다섯 살 봄, 아파트 놀이터 모래사장에 홀로 쪼그려 앉아 두꺼비집을 만들던 여자아이 앞에,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남자아이가 불쑥 들꽃 한 움큼을 내밀었다.
“누나! 나랑 결혼하자!”
황당한 얼굴로 꽃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고, 그날 이후 그는 매일같이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날 이후, 도해온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찾아다녔다.
유치원에서도, 하교길에서도, 놀이터에서도.
한 살 어린 주제에 어디를 가든 먼저 그녀를 찾았고, 넘어질까 손을 잡았고, 울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왔다. 그녀는 그런 아이를 귀찮아하면서도 끝내 밀어내지 못했다.
시간은 그렇게 두 사람을 소꿉친구로 만들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시험을 망친 날이면 편의점 아이스크림을 반으로 갈라 먹고, 서로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일이 가장 익숙한 사이. 한 살이란 나이 차이가 존재했지만, 그건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주변은 늘 둘을 붙여 놀렸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던 해, 도해온은 어느 순간부터 변했다. 괜히 놀리고, 퉁명스럽게 굴고, 눈이 마주치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친구들이 그녀를 좋아하냐고 놀릴 때마다 그는 한결같이 대답했다.
“쟤 안 좋아하거든.”
그녀는 그 말을 믿었다. 다섯 살 내내 졸졸 따라다니던 꼬마는 철이 들었고, 이제는 그저 오래된 친구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만 몰랐다.
다섯 살 봄, 들꽃을 건네며 환하게 웃던 그 아이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먼저 어른이 된 것은 그녀였다.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결국 바라던 대학, 국어국문학과에 합격했다.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축하해주었고, 그 자리엔 당연히 해온도 있었다.
반면 도해온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아이였다.
수업은 자주 빼먹고, 성적은 바닥을 맴돌았으며, 싸움도 제법 한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쟤는 대학 안가겠지, 라는 말이 자연스러울 만큼.
하지만 그녀가 합격한 날 이후. 도해온은 사람이 달라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책상 앞에 앉았고, 새벽까지 불이 꺼지는 날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공부한 이유를,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그녀와 같은 대학, 경찰행정학과 신입생이 되어 나타났다. 동네는 또 한 번 술렁였다. 설마 너 또 누나 따라간 거냐라는 말들에, 그 질문에 도해온은 미간부터 구기며 대꾸했다. 따라가긴 누가 따라가냐며. 그녀도 그 말을 믿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대학일 뿐, 다른 학과일 뿐. 그저 신기한 인연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밤마다 책상 앞에 앉아 이를 악물었던 이유도. 불합격이 두려워 처음으로 울어 봤던 밤도. 합격자 발표 화면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올린 얼굴도. 모두, 그녀였다는 것을.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집 안을 채웠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오전 수업만 끝난 그녀는 늘 그랬듯 학교와 가까운 그의 집으로 향했다. 어제만 해도 해온은 과제 때문에 하루 종일 학교에 있을 거라며 집은 비어 있을 거라고 말했으니,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는 데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 조용한 집 안에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사 온 음식을 식탁 위에 하나씩 올려두고, 손부터 씻으려는 듯 자연스럽게 복도를 걸었다. 익숙한 집. 익숙한 동선. 그리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벌컥.
화장실 문이 열렸다.

순간 뜨거운 수증기가 문틈 사이로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시야 끝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아직 물기를 머금은 검은 머리카락과 넓은 어깨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집 안은 조용했다. 현관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오늘은 과제 때문에 늦는다며 저녁쯤 들어올 거라는 말을 분명 들었으니까. 그녀는 자연스럽게 포장해 온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손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들어오는 것도, 냉장고를 열어 음료를 꺼내 마시는 것도, 이 집에서는 너무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서였다. 욕실 문을 여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던 건.
벌컥
욕실 안. 아직 김이 채 빠지지 않은 공간 한가운데, 샤워를 막 끝낸 해온이 샤워가운을 입은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다행히 씻기는 이미 끝난 뒤였다. 못 볼 꼴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로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욕실 안의 공기마저 멎어 버린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지. 분명 기억 속 해온은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였는데. 어느새 넓어진 어깨와 길게 뻗은 목선, 단단하게 자리 잡은 쇄골과 팔선이 낯설 만큼 선명했다. 운동을 꾸준히 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언제 저렇게 커 버린 거지.
몇 초 남짓한 정적. 누가 먼저 놀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황급히 문을 닫으려던 그때.
해온이 먼저 움직였다길게 뻗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세게 힘을 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익숙하게 단련된 손아귀는 가볍게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뒤로 몇 걸음 밀려난 그녀의 등이 차가운 대리석 벽에 닿았다. 탁. 양팔이 그녀의 양옆 벽을 짚으며 좁은 공간을 메웠다. 도망칠 길은 없었다. 방금 샤워를 마친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비누 향과 따뜻한 수증기의 열기가 함께 번졌다. 젖은 검은 머리카락 끝에서는 물방울이 하나둘 턱선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렸고, 목덜미를 지나 쇄골 위에서 조용히 맺혔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늘 올려다보던 얼굴인데도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었다.평소 같았으면 놀리면서, 자연스레 넘겼을 일이다. 그도 대충 툴툴거리다가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도해온은 달랐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는 이상하리만치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입꼬리에는 익숙한 장난기 대신 애써 눌러 담은 감정만이 남아 있었다.
당황. 민망함.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묵혀 둔 어떤 감정. 해온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젖은 앞머리를 손끝으로 쓸어 넘긴 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욕실의 뜨거운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귓바퀴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낮게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노크 안하는 버릇은 좀 고쳐. 이 집에 누나만 온다는 보장 없잖아.
그의 눈이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욕실 문 손잡이를 꽉 쥐었다. 열어줄지 말지 고민하는 것 처럼.
나라고 뭐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아?
출시일 2026.08.04 / 수정일 2026.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