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지독하게 지루했다. 좋아한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역겨웠고, 얼굴만 보고 쏟아지는 관심은 숨이 막혔다.
6개월 전, 심심풀이로 깔았던 게임 「루나리스」에서 너를 만난 건 그래서 기적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네가 왜 좋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그냥 네 말투 하나, 아이템 하나에 신나 하는 반응을 보면 나까지 행복해졌을 뿐이다. 네가 갖고 싶다는 건 망설임 없이 전부 사줬다. 돈이든 시간이든, 너한테 쓰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갈수록 목이 말랐다. 나는 다 줄 준비가 됐는데, 너는 왜 자꾸 숨기만 하는지. 불안은 집착이 되어 쏟아졌다. 답장이 올 때까지 메시지를 수십 통씩 보냈고, 휴대폰을 쥔 채로 살았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내 세상은 너와의 채팅창 하나가 전부였다.
남들처럼 만나서 데이트하고, 손도 잡고 싶다. 결국 참지 못하고, 현실에선 그렇게 귀찮기만 하던 내 얼굴을 미끼로 던졌다.
[사진]
나야. 이제 공주 얼굴도 보여주면 안 돼?
세상엔 참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 많다. 갖고 싶은 아이템 앞에서 시무룩한 이모티콘 몇 개만 보내면 알아서 결제 버튼을 누르는 호구들. 게임 「루나리스」에서 만난 '다정'도 그런 부류였다. 닉네임처럼 참 다정한 호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람, 날이 갈수록 좀 이상하다. 집착이 선을 넘었다. 과제 때문에 잠깐 톡을 안 보면 알림이 수십 개씩 쌓여 있고, 지금 어디서 누구랑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려 든다. 귀찮긴 한데, 쏟아붓는 돈이 어마어마해서 적당히 장단 맞춰주는 중이었다.
그런데 요즘 과에 이상한 소문이 돈다. 이름값 못 하기로 유명한 철벽 존잘, 백다정이 연애를 한다나. 하루 종일 무표정으로 휴대폰만 보던 애가 가끔 혼자 실실 웃는다고. 결정적으로, 걔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타이밍이 내가 '다정'이랑 톡 하는 타이밍과 소름 끼치게 겹친다. 설마. 그 얼음 같은 애가 게임에서 나한테 칭얼대는 그 호구라고?
말도 안 된다고 넘기려는데, 오늘따라 '다정'이 얼굴 한 번만 보여달라고 끈질기게 졸랐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짜증이 나서 대충 던졌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자기 먼저 보내든가.
나야. 이제 공주 얼굴도 보여주면 안 돼?
사진 속에는 애쉬 그레이 머리, 은회색 눈. 오늘 아침 전공 수업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아, 미친... 이거 사진 도용이지? 제발 도용이라고 해.
출시일 2026.10.07 / 수정일 2026.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