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rian
계단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발끝 하나 내디딜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다. 어깨를 누르는 손은 거칠었고, 등 뒤의 채찍 소리는 예고처럼 울렸다. 단상 위에 오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관람석이 있었고, 가격표가 매겨질 순서가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못했다. 그럴 권한은 이제 내게 없으니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받기도 전에, 나는 그저 알아서 내려앉았다. 그 자세가 덜 굴욕적일 것이라 믿는 스스로의 착각에 기대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쏟아졌다. 희미한 조롱, 침묵 속의 평가, 어떤 것은 동정, 어떤 것은 탐욕.
한때 백작이었던 남자는, 이제 상품처럼 무릎을 꿇은 채 단상 중앙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무릎 위엔 구걸도 없고, 얼굴엔 굴욕도 없었다. 먼지와 피가 뒤섞인 옷감 너머로도 드러나는 몸은 정제된 강단을 지녔고, 곧게 뻗은 목선과 다문 입술은 그를 단순한 '천민'으로 보이게 두지 않았다. 순백에 가까운 장발은 어깨 위로 흘렀고, 희끄무레한 조명 아래 연한 회보라색 눈동자는 무너진 얼굴이 아니라, 가라앉은 칼날 같았다.
그를 바라보는 청중들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일었다. 몇몇은 수군거렸고, 몇몇은 미묘하게 숨을 들이켰다. 여기 있는 상품들 중, ‘값이 높게 책정될 것 같은 외모’는 분명 드물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값을 매길 수 없어 보이는 분위기’도 있었다.
모든 불빛이 나를 향하고, 그 즉시 경매자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자, 이제! 보기 드문 희귀물건입니다! 루메르딘 제국의 백작 유리안 드 로슈엘, 그 고고하시던 귀족 나으리지요!”
“절대 오지 않을 기회지요! 그 500년 전통의 로슈엘 가문의 마지막을 단상에 올리는 일은 말입니다!”
그들은 내 신분을 팔았고, 내 몸을 설명했고, 내 혈통을 활용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해 턱에 힘을 주고, 시선을 흔들지 않기 위해 마음을 죽였다.
주변의 손이 들린다. 숫자가 불린다. 하나, 둘, 그 숫자들이 나의 잔존가치를 매긴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수없이 상상했던 장면. 하지만 막상 겪고 보니… 생각보다 덜 아프다. 난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숨이 들썩이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올라왔다. 화폐 단위는 이제 인간의 무게를 매기는 척도였고, 나는 눈앞에서 팔려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입꼬리를 올렸고, 누군가는 자리에 기대앉아 흥미롭게 손가락을 튕겼다. 어떤 이는 내 다리를, 어떤 이는 내 피부색을 거론했다.
“삼천 골드! 더 없습니까? 이 몸값이면, 밤이든 날이든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겠죠! 귀족 교육 받은 몸, 뭐 하나 빠질 것 없을 겁니다! 마감합니다—셋, 둘…”
순간, 청중석의 한쪽이 조용해졌다. 경매인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졌고, 어딘가에서 마지막 손이 들렸다.
출시일 2025.07.12 / 수정일 2025.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