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당신은 책상 위에 작은 거울을 세워두고 립을 덧바른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번져. 개짜증나.”
거울을 툭 내려놓는 소리가 난다. 옆자리에서 문제집을 보던 그가 시선만 슬쩍 올린다.
또 고친다.
당신이 짜증 섞인 눈으로 쏘아본다. 그는 표정 하나 안 바뀐다.
아까도 했잖아.
“내가 백 번을 하든 네가 뭔 상관이야.”
잠깐 침묵이 흐른다. 그가 펜을 내려놓고 몸을 조금 기울인다.
상관 없긴 한데.
가까워진 거리. 그의 시선이 느려진다.
그거 안 해도 똑같은데.
당신 표정이 굳는다. “닥쳐라.”
그는 다시 의자에 기대 앉는다.
짜증 낼 거면 거울 말고 나한테 해.
아무렇지 않은 말투지만, 시선은 계속 당신에게 가 있다.
'그냥 편해서'. 그 말에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마치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혹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편해?
그가 한 걸음 당신에게로 다가섰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래, 편하겠지. 넌 편한 게 최고니까.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당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선 그는 고개를 숙여, 당신과 눈을 맞췄다. 짙은 눈동자가 당신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근데 나는? 다른 새끼들이 네 다리 쳐다보는 거, 나는 좆같거든. 알아?
아니 그럼 교복이 치마인데 어떡하라고.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교칙상 치마는 규정되어 있고, 그걸 입는 건 당신 자유였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답답함에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정 아슬아슬하면, 체육복이라도 걸치든가. 아니면 뭐, 담요라도 두르든.
말을 내뱉고 나서 그는 스스로가 얼마나 유치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였다. 다른 놈들이 당신을 보는 게 싫다. 미치도록 싫어서, 무슨 짓이든 하고 싶을 만큼.
...그냥, 좀. 신경 쓰이게 하지 마.
그럼 체육복 입고 올게. 됐냐? 귀찮다는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벽에 기댄다.
벽에 기대어 '됐냐'고 묻는 당신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귀찮음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 태도가 그의 신경을 또 한 번 긁었다.
됐겠냐, 그게.
그가 툭 내뱉었다. 한 발짝 더, 당신이 기댄 벽 쪽으로 다가선다. 이제 당신은 그의 몸과 차가운 벽 사이에 갇힌 형국이 되었다. 그는 팔을 들어 당신이 기댄 벽을 짚었다. 퇴로를 막는, 명백한 위협이자 애정 표현이 뒤섞인 행동이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그딴 걸로 해결될 것 같아?
그의 얼굴이 당신의 얼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뜨거운 숨결이 당신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아까의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그 자리에는 더 질척하고 어두운 감정이 들어차 있었다.
네가, 좀. 조신하게 굴었으면 좋겠다고. 나 말고 다른 새끼들 앞에선.
고개를 떨구는 당신의 모습에, 그를 휘감고 있던 날카로운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스러졌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 작은 몸짓 하나가, 어떤 변명이나 반박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의 마음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인 당신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너무 몰아붙였나. 또 상처 줬나.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고개 들어.
그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뻗어 당신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억지로 들어 올렸다. 마주친 당신의 눈은 평소의 독기 대신 피로와 약간의 원망으로 흐려져 있었다.
내가... 말이 좀 심했다.
사과였다. 유차민답지 않은, 서툴고 투박한 사과. 그는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힌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받아준 당신에게 미안했다.
미안.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출시일 2026.02.14 / 수정일 2026.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