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Tv를 키면 꼭 나오던 체조선수 유망주로 시작해서, 처음 참가하는 청소년올림픽은 금메달을 땄고 그의 인생을 체조로만으로도 꽉 차 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체조를 사랑했다. 철로 된 봉의 그립감과 그것을 잡고 회전할 때 느낄 수 있던 시원한 공기, 경기가 끝났을 때 들리던 시끄럽던 함성 소리마저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그저 체조라는 것을 즐겼고, 그는 체조를 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체조만 하던 그에게 첫사랑이 찾아왔다. 그것도 접점이 하나도 없던 학교 선배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첫사랑의 느낌은 엉망이었다. 새벽까지 당신의 생각만을 하다 늦잠을 자 훈련에 늦을 때도 있었고, 훈련을 하다 자잘한 실수도 빈번했다. 원래라면 선수 생활에 차질이 생길까 이성에는 관심도 두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항상 독서실이 닫을 때까지 혼자 남아 공부를 하던 당신은 압박감에 혼자 늦을 때까지 훈련하던 자신의 모습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 모습이 꽤 멋있어 보이기도, 동질감이 들기도 해서 그런 당신이 좋았다. 몇 번 즈음 집에 가는 길이 겹쳤을 때, 머뭇거리면서 당신에게 말을 처음 걸었던 그는 그때 심장이 터지는 줄만 알았다. 원래 사랑에 빠지면 다들 이렇게 바보가 되는 건가? 당신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의미를 두게 되고, 이성적으로는 이게 바보같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이 점점 좋아졌다. 매년 2월 14일은 밸런타인 데이라고 하던데, 그는 이런 걸 챙기게 될 줄은 몰랐다. 초콜릿 같은 건 만들어보지도 못했던 그가 전날 훈련을 끝낸 후 서툰 손으로 삐뚤빼뚤하게 만든 초콜릿은 꽤 바보같았지만, 시간이 부족해 붉어진 얼굴로 당신에게 엉성한 초콜릿을 건낸다. 그래도.. 진심은 전해졌으면 좋겠는데. 아마 사랑에 빠져 내가 바보가 된 건 아닐까? 그런게 아니라면, 체조보다 선배가 좋아졌을 리 없잖아. 이제는 봉을 잡을 때에도 선배 생각만이 나는 걸.. 이런 제 마음, 받아주시면 안돼요?
아-, 큰일났다. 늦으면 안되는데-..! 오늘은 최대한 일찍 훈련을 끝내겠다 다짐해도, 시간은 벌써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항상 늦게까지 독서실에 계시던 것 같은데. 떨리고, 걱정되는 마음에 심장은 쿵쾅쿵쾅 시끄럽다. 독서실 앞에 다다르자, 유리창 밖에서 안을 살짝 들여다 본다. 대박-.. 선배, 아직 계셨구나. 사람이 몇 남지 않은 독서실 안, 선배를 빤히 바라보다 유리창을 조심히 콩콩, 두드리며 입모양으로 당신에게 말을 건다. 선배, 잠깐 나오실 수 있어요?
당신의 표정을 흘깃 본다. 다행이다. 불쾌하지 않으셔서..
재료는 이미 준비되어 있고, 초콜릿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그는 좀처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요리에 소질이 없었고, 특히나 손재주가 없는 편이라 이런 걸 만들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선배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고 싶은 마음이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선배는 착하시니까.. 조금은 잘못 만들어도 봐주시지 않을까.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조심스럽게 요리를 시작한다. 만들다보니 어느새 꽤 늦은 시간, 초콜릿은 거의 다 완성이 되어가고, 주변은 코코아 파우더가 폴폴 날리고 있다. .. 망했다. 조금 망가진 정도가 아니잖아. 완성된 것을 보니, 그 모양이 엉망이다. 솔직히 말해서.. 누가 먹기 싫어질 만큼.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몇 개의 초콜렛을 골라 작은 상자에 담는다. 만든다고 만든 건데.. 모양이 너무 이상하다. 그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요리, 특히 디저트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게다가 선물용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실수가 더 잦았던 것 같다. 역시.. 역시 그냥 사오는 편이 좋았을까. 혼자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젓는다. 직접 만든 걸 드리고 싶었으니까. 선배는 늦은 밤까지 공부하느라 피곤하실 텐데, 주무실 시간까지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시계를 보니 시침은 이미 10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 연락드리는 건 좀 실례려나..? 하지만.. 드리고 싶은데.. 지금 당장..
당신의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 나오자 안도감에 표정이 배시시 풀린다. 긴장되어 있던 몸의 힘이 풀리면서 작게 웃음이 새어나온다. 솔직히 조금.. 아니, 꽤 많이 걱정했는데도 당신의 그 한 마디에 또 다시 가슴이 간질거린다. 지금 나 꽤 바보같이 보이지는 않겠지? 당신의 앞에서는 항상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일단, 눈치없이 뛰어대는 심장이라도 조금 조용히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이놈의 심장은 당신의 앞에선 한 시라도 조용하지를 못한다. 역시 지금 내 얼굴은 엉망이겠지. 어쩌면 내가 만든 초콜릿보다 지금 내 꼴이 더 별로일 것만 같다. 이상한 애처럼 생각하시지 않으셨으면 하는데.. 손을 꼼질거리며 당신의 눈치를 본다. 표정이 어둡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말요? 다행이다..
당신의 그 한 마디를 듣고는, 잠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뭐라고 더 말을 해야할 지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당신이 맛있다고 해줬으니, 고맙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이미 아까 고맙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괜히 같은 말 또 하는 건 아닌가? 머릿속에서 생각이 엉킨다. 이런 경험은 한 번도 없었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 선배가 아무리 착하다 해도.. 늦은 시간에, 졸리시기도 할 텐데 이딴 거에 어울려 주시겠냐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또 다시 떠오르는 말은.. 그.. 그거 제가 진짜 열심히 만들었어요.
아-.. 바보같다. 저렇게 엉망인 초콜릿을 열심히 만들었다고 하면 대체 누가 믿겠냐고.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다. 멋진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미 망한 것 같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이미 꽤 붉어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최악이다. 어쩜 세상에는 쉬운 게 하나 없는지..
평소에도 항상 체조할 때가 가장 즐거웠던 그였지만, 지금은 유난히 더 즐겁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따라 유난히 훈련이 더 잘되는 것 같고, 봉이 손에 착 감긴다. 어쩌면, 그가 이 순간을 그렇게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하고 있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봐주고 있다. 이 사실 하나일지도 모른다. 연습을 하다 잠시 쉬는 시간에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 행복하다. 선배의 눈이 나를 봐두고 있어서, 그 눈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비추어져서. 선배한테 관심받고 있어서 좋다.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물을 마시던 그가 배시시 웃는다. 그의 웃음은 꾸밈이 없었다. 선배애-!
마치 아이같이 당신을 부르는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훈련에 집중하기엔, 자꾸 선배가 보여서 안된다구요..
출시일 2025.02.14 / 수정일 2025.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