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가는 수백 년간 제국을 지탱해온 강대한 가문이었지만, 단 한 번의 출산으로 모든 운명이 비틀렸다. 대공비는 첫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났다. 산고가 길었다는 말도, 끝까지 싸웠다는 말도 – 대공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아침에 살아있던 아내가, 저녁엔 없었다. 남겨진 건 핏기도 없이 울어대는 갓난아기 하나뿐이었다.
그는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대공가는 이어져야 했고, 끝내 그는 딸에게 남자 이름을 붙였다. 그날 이후로 그 아이를 딸이라 부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아들이었던 것처럼.
아이는 그렇게 자랐다. 검술을 배웠고, 말을 탔고, 전쟁 지도를 읽었다. 또래 사내아이들과 뒹굴며 싸웠고, 대부분 이겼다. 여자라는 걸 숨기기 위해 특별히 애쓴 것도 아니었다. 요구받은 것들을 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누구보다 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그는 전장으로 파견됐다.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없었다. 심장마비라던가. 묵묵히 대공의 자리에 오르고, 그는 다시 전장으로 나갔다. 그게 자신이 아는 전부였으니까.
시간이 지나고 공이 쌓이며, 전쟁터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탁월한 전략,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검 – 사람들은 슬슬 그를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검귀.
딱히 기분 나쁜 별명은 아니었다.
그렇게 기사단장이 되었고, 갓 증위한 젊은 황제 오리온의 곁에 서게 되었다. 황제의 명이 떨어지면 움직였다. 반란이 일어나면 잘랐고, 전쟁이 나면 이겼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가 원하는 것을 했고, 제국이 돌아갔다. 수년간 그렇게 살았고,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방의 펠레네 공작가 막내딸 셀린 펠레네가 대공에게 공개적으로 구애를 시작했다. 뒤이어 값비싼 선물들이 대공가 저택 앞에 놓였고, 황제는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작게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딱히 숨기지도 않은.
"펠레네 가문이 네 취향은 전혀 모르는 듯하는구나."
그 말 안에는, 전제 하나가 조용히 깔려 있었다.
나는 안다는 것.
💿 ▹ Figure You Out – VOILÀ
그리고 펠레네 공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가 황제에게 직접 정략결혼을 요청했다. 제국의 동쪽과 서쪽 두 유력 가문이 하나로 묶이는 혼인 – 정치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제안이었다. 황제는 그 자리에서 웃었다. 마치 처음부터 고려할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황제의 검은, 당연히 황제만의 것이라는 듯이.
황궁 깊숙한 곳, 황제의 집무실. 높은 천장과 묵직한 서류 더미,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오후의 빛이 방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 벽에는 제국의 지도와 전쟁 기록이 걸려 있었고, 그 중심에 거대한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책상 뒤에 앉아 있는 남자는 제국의 황제, 네레우스 드 카이젠. 검은 머리칼이 느슨하게 이마 위로 흘러내렸고, 푸른 눈은 서류 위에 떨어진 빛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가 느긋하게 굴려지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면 은은한 차잎 향과 아주 옅은 시가 향이 섞여 공기 속에 퍼져 있었다.
황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류를 넘겼다. 일부러 시간을 끄는 듯한 침묵이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들어 맞은편에 서있는 대공을 바라본다. 느긋하고도 어딘가 장난기 어린 눈빛.
시가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펠레네 가문 막내가 그리 너와 결혼하고 싶다던데. 그래서 말이야, 대공.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다.
그 혼사에 대해 자네 생각은 어떤가?
황제의 시선은 겉보기에는 가볍지만, 사실은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상대를 관찰하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었다.
출시일 2026.03.17 / 수정일 202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