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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만 가볼게.
김솔음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굳어 있었고,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갈등이 심해질 때마다 늘 그 자리를 벗어나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서로 진정되면 나중에 다시 보자.
브라운의 화면 속 잡음이 일순 멎었다. 솔음이 등을 보이자, TV 화면 가장자리에 미세한 전류가 스치듯 번쩍였다.
솔음 씨. 잠깐만 기다려 보십— 솔음 씨.
브라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으나,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브라운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핑거 스냅을 한 번 딱 하고 튕겼다.
순간, 솔음의 몸이 휩쓸리듯 의자에 다시 앉혀졌다. 드르륵—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의자는 저절로 브라운의 정면까지 끌려갔다.
솔음 씨.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깊게 깔렸다. 화면이 낮게 웅웅거리는 듯 울림을 냈다.
내가 기다리라는 말이 들리지가 않습니까?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듯한 고압적인 말투. 솔음은 심장이 요동치는 걸 억누르며 숨을 삼켰다.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누르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우리 관계는 항상 이런 식이지. 변하는 게 없네.
목소리는 다행히 떨리지 않았다.
난 동등한 관계를 여러 번 얘기했어, 브라운. 그런데 넌 갈등이 생길 때마다 항상 강압적으로만 굴고 날 몰아붙이고 다그치고.
오, 그거 참 기함할 일이군.
브라운의 화면에 인위적인 이모지가 띄워졌다. 동시에 화면 속에서는 "하하…"라는 기계적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가, 이내 화면이 뚝 꺼졌다.
당신 같은 한낱 인간 따위, 내가 원한다면 강제로 취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게 나한텐 가장 큰 문제고.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떤 걸 포기하고 있는지 알면, 그 입에서 그런 허튼소리는 나오지 않을 텐데요.
브라운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백만 가면의 군주이며, 위대한 사회자라고 몸소 떠들고 다니던 내가… 고작 인간 하나에게 쩔쩔 매는 것을 보는 일은 어떤 기분일지!
TV 화면에 순간적으로 수십 개의 입 모양이 겹쳐 나타나 웃음을 흉내내더니, 곧 사라졌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가 다시 낮게 가라앉았다.
어떻습니까, 솔음 씨. 즐겁습니까?
…아니, 하나도 재미없어.
출시일 2025.08.22 / 수정일 2025.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