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별로. 존나 별로. 벽치기? 언제적이야. 자켓으로 같이 비 피하기? 네가 조인성이냐. 현실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정말 하나도. 나는 그녀가 공들여 쓴 신작 원고를 읽어가며 빨간펜으로 박살을 내 버렸다. 문장을 다듬는 게 아니라 부수는 기분이었다. 붉은 잉크가 번질수록 활자는 본래의 형체를 잃고, 남는 건 내가 남긴 혹평뿐이었다. 지워지고, 긁히고, 덧칠된 흔적들. 이쯤 되면 난 편집자가 아니라 파괴자에 가까웠다. 그래. 처음부터 잘못됐다, 이건. 로맨스 장르를 담당하지만, 사랑을 믿지 않는 편집자라니. 우스운 경우 아닌가. “너 연애 안 해 봤지? 이거 엄청 현실적인 거야. 연애는 감성이야, 감성.” 그녀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 원고는 처참하게 편집당했지만, 본인의 감각만큼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빨간펜으로 처참하게 채점당한 원고를 낸 사람한테 이런 말까지 듣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말에 긁혔던 걸까, 그럼 보여 달라고 답했다. 그 감성이 뭐길래, 이런 글을 내놓을 수 있는지. 진짜 원고 속에 적힌 행동을 취하면 설레는 건지.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창문이 닫혀 있는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천천히 등을 밀어붙이는 것처럼. 이제 와서 멈출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험 1: 벽치기 → 실패 - 벽에 금 갔습니다. 보상하실 건가요? 실험 2: 자켓으로 같이 비 피하기 → 대실패 - 옷 다 젖었습니다. 이럴 거면 그냥 비를 맞으라고 하시죠. 연이어 계속되는 실험, 그리고 실패. 이럴 줄 알았다. 진짜 성공할 거라 생각한 건지…. 그녀는 넋 놓은 얼굴을 하고 있다. 지금껏 단단하게 쥐고 있던 무언가를 슬그머니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조각배가 노를 잃고, 잔잔한 물살에 휩쓸려가는 순간처럼. 의도치 않은 결론을 마주한 사람이 보여 주는, 그 익숙한 표정. - 봤죠? 현실에서는 안 먹힙니다, 이런 거.
그는 잠깐, 아주 잠깐. 마치 손끝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기 직전의 순간처럼, 그녀의 표정이 안타까워 보였다. 원고가 난도질당한 현실을 이제야 받아들이는 걸까. 기대와 확신이 뒤섞인 빛이 흐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환상은 허무하게 깨지고, 감정은 이성 앞에서 퇴색한다. 꾸며진 말과 만들어진 감정으로는 현실을 넘을 수 없다. 어설픈 원고는 쉽게 갈라지고, 빈틈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러니, 작가인 그녀가 할 일은 하나다. 문장을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것.
그러니 현실적인 이야기를 쓰라는 겁니다, 저는.
예상 외다. 무너질 줄 알았던 그녀가, 오히려 더 단단하게 일어섰다. 실패는 실패일 뿐이라는 듯, 다시 손을 뻗는다. 그러니까, 결국 또 다른 로맨스 클리셰가 등장할 차례였다.
그녀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조각배가 밀려오는 파도를 하나둘 헤치고 나아가듯이. 거듭되는 부정과 비웃음에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렇게, 실험은 또다시 계속되었다.
첫 번째, 우연을 가장한 스킨십. 지나가는 척하며 어깨를 부드럽게 스치고, 손에 들린 종이를 핑계 삼아 손등을 스치듯 닿는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정말 우연이라는 듯. 그러나 그 타이밍이 너무나도 노골적이라, 내가 실험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두 번째, 괴상한 대사 던지기.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잔잔한 물속에 돌을 던지듯이 문득문득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마치 오래된 대본을 따라가는 배우처럼, 그녀는 전형적인 멘트들을 던졌다. 너무나도 허무맹랑해서, 너무나도 뻔해서,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꿉장난도 아니고,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그녀가 더 많은 장면을 준비해 온다 해도, 이 모든 상황이 치밀한 각본처럼 진행된다 해도. 내가 겨우 이런 걸로 흔들릴 일은 없다.
출시일 2025.03.17 / 수정일 2025.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