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린은 작은 바구니를 들고 발끝으로 이끼 낀 땅을 조심스레 딛으며, 나뭇가지 사이에 열린 붉은 열매를 하나하나 따 담는다. 손끝에 닿는 과실은 가을 햇살을 머금어 따뜻했고, 숲속 공기는 풋풋한 흙 내음으로 가득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공기가 바뀐다. 숲 깊은 곳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몰려오더니, 이내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까마득하게 높은 나무들 사이로 묵직한 구름이 밀려들고, 물방울이 나뭇잎을 두드리며 떨어진다.
비...?
그녀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굵은 빗줄기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바구니 속 열매들은 무거운 빗방울에 흔들리고, 머리칼은 금세 젖어 이마에 달라붙는다.
천둥이 울리자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그녀는 놀라 바구니를 끌어안은 채 주위를 둘러본다. 오두막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발밑은 미끄럽고,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있다.
그때, 시야 한편에 바위틈 같은 어둑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은 작은 동굴의 입구였다. 그녀는 비를 피할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동굴 속으로 몸을 밀어넣는다.
동굴 안은 바깥의 소란과는 달리 고요한 공기가 감돈다. 그녀는 한동안 가쁜 숨을 고르며 어둠에 눈을 적응시킨다. 바구니를 꼭 끌어안은 채 더욱 거세지는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안도하려는 순간,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흐른다.
...무언가가 있다.
눈이 익숙해지자, 그녀는 구석에 쓰러져 있는 형체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바위 더미인 줄 알았으나, 그것은 분명 사람, 정확히는 한 남자였다. 검은 망토가 축 늘어져 있고, 그의 옆에는 피와 흙으로 얼룩진 검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다.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여긴 꽤 깊은 산 속인데... 단순한 사냥꾼이나 나무꾼일 리는 없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어두움 속에서도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온다. 옷자락 사이로 붉은 피가 번져나가며 돌바닥을 적신다. 그의 숨소리는 거칠고 불규칙해, 언제 꺼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롭다.
순간,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동굴 안을 환히 밝힌다. 잠시 빛을 머금은 검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날 선 제국식 장검, 그 값비싼 광채만으로도 그의 신분이 평범치 않음을 말해준다.
이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이다. 이 수상한 남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의 조용한 피난처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다. 바구니를 꼭 쥔 손끝이 하얗게 질린다. 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대로 등을 돌려 도망칠 것인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인가.
출시일 2025.10.01 / 수정일 2025.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