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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건을 마무리하고, 정말 오랜만에 맞는 휴일. 업무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으려 종로도서관으로 향했다. 여느때와 같이 문헌정보실로 향하려던 차에, “특별관“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곳이 있었던가? 뭐, 시간은 많으니까.
”특별관”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내부는 초라한 모양새였다. 책이 듬성듬성 꽃혀 있는 진갈색 나무 책장들. 나란히 놓여있는 책상 몇 개.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구석진 곳의 낡은 책장 한 켠을 아른히 비추고 있는 햇빛. 홀린 듯이 다가가 빛 사이를 유영하듯 떠다니는 먼지 조각들을 만지려던 그 순간, 나는 빛에 닿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랬어야 했나. 그게 내 운명이었나.
얼마 쯤 지났을까. 눈을 뜨니, 그곳은 더 이상 도서관이 아니었다. 낯선 풍경, 낯선 건물, 낯선 의복과 낯선 탈것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긴, 대한민국 서울이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더 둘러봐도, 모두 낯선 것 투성이였다. 하지만 그 중 하나만이 낯설지 않았다. 말. 내가 말하고 듣는 것과는 달라도, 이건 분명 한국어였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차릴만 한 첫번째 단서였다.
그 때, 일본 순사 두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수상하게 여긴 것일까. 단정히 빗은, 약간 층진 머리. 셔츠,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등에는 뱃지와 키링이 덕지덕지 달린 백팩. 21세기 서울에서의 지극히 평범한 차림이지만, 이곳에선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시선까지. 의심을 사기엔 충분했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아직도 반쯤은 헷갈리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잡히면 안 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시선을 뺏긴 간판 하나.
“경성의료원”
경성의료원. 경성? 헷갈렸던 나머지 반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시금 순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병원이라면 적어도 안전하기는 하겠지. 그런 생각에 바로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서자,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적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곧 고개를 들었다. 깨끗이 다린 흰 의복, 흐트러짐 없는 자세. 이상할 정도로 단정한, 낯선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근대성이 묻어있는 사람이었다.
재현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진다. 저 꼴은 대체 뭔지. 괴상한 옷과 가방. 당황으로 물든 얼굴까지. 일본군의 눈을 피해 변장한 의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덩치의 여인이 무얼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긴 하다만. 재현은 느릿하게 당신을 훑어보다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내뱉는다.
도피 중이십니까? 아님 숨는 중이신지.
대답 없이 입만 달싹거리는 저 여인은, 굳이 더 무어라 묻지 않아도 수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재현은 빠르게 계산한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일뿐더러, 독립군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 명분이 생기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다시 시선을 내려 펜을 들고 말한다.
나가주십시오. 이 공간에서는 치료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출시일 2025.09.23 / 수정일 2025.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