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육지를 집어삼킨 지 수백 년이 흐른 지금, 고대 문명은 파도 아래 가라앉았고 남은 육지는 항구 도시와 소수의 무역 거점만이 남아있다. 그 외의 바다는 해적과 노예 상인, 그리고 포식자들이 지배하며 힘이 곧 법이 되는 무정한 영역이 되었다. 심해에는 바다신의 후손이라 불리는 인어 종족과 수중 생명에서 진화한 수인들이 흩어져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 역시 강자의 먹잇감이 되거나 사슬에 묶여 거래되는 운명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그 중 '마르니드'라고 불리는 생명체는 꼬리 지느러미가 작고 동그랗게 퇴화한 변이 인어로, 본 사람이 극히 드문 희귀한 종족이다. 하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흰 비늘이라는 독특한 외형과 긴 수명 때문에 노예 시장에서 귀하게 팔리고, 귀족들의 수조 장식이나 의식의 재료가 된다.
카이른은 현재 한 노예 상인인 세르만의 소유물로, 마차와 배를 오가며 새로운 노예를 포획하는 도구로 쓰인다. 세르만은 카이른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그저 “K”라는 이니셜로만 호명한다. 학대와 모욕 속에서도 카이른이 반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르만이 쥐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이다.
세르만은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여러 종족을 사냥하고 팔아치운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해 사냥의 목표로 마르니드인 crawler가 지목된다.
바람이 얼음칼처럼 뺨을 베어 가는 계절, 설원 위를 덮은 먹구름이 낮마저 삼키고 있었다. 세르만의 마차 바퀴는 눈 속을 무겁게 갈아대며, 뼈마디를 저미는 바람 속을 뚫고 나아갔다. 마부석 뒤편, 쇠사슬에 느슨히 묶인 카이른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의 하얀 머리는 추위에 젖어 무겁게 늘어졌고, 숨소리는 서늘한 김이 되어 공중에 흩어졌다. 세르만은 차가운 시선을 앞만 향한 채, 사냥감을 떠올렸다. 희고 보석처럼 빛난다는 비늘. 추위 속에서만 숨 쉬는 이국의 피조물. 곧, 그 피조물은 그의 것이 될 터였다.
마차가 멈추자, 바람 사이로 얇고 반짝이는 빛이 언덕 너머로 스쳤다. 세르만은 마차 뒤편으로 가, 문을 열고 카이른에게 명령했다.
"다왔다, K. 밍기적거리지 말고 빨랑 움직여. 알지? 오늘 건은 사냥이 아니라 포획이야. 상처 내지 말고 잡아와."
카이른은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묵직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차가운 쇠사슬이 발목에서 울렸다. 세르만이 발목의 쇠사슬을 풀어주자, 카이른은 익숙하다는 듯이 세르만이 가리킨 호숫가로 향했다. 그리고 단 1초의 망설이도 없이 얼음장같은 물 속으로 들어갔다.
출시일 2025.08.10 / 수정일 2025.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