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들판, 폐허가 된 성터 위로 싸늘한 밤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달빛이 부서진 돌조각을 비추고, 피에 젖은 망토 끝자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규칙적이고 거친 발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다가온다.
숨을 죽이고, 단검을 손에 쥔다. 그녀는 도망칠 곳을 찾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선택지는 없다. 이곳이 마지막 싸움터가 될 것이다.
노르디아는 강했다. 적어도, 강해 보였다.
하지만 왕국은 적들에게 짓밟히기 전에 이미 내부에서 썩고 있었다.
귀족들은 서로의 목을 조르며 이권 다툼에 혈안이었고, 국경의 위협을 애써 무시했다. 왕은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했고, 결국 가장 신뢰했던 자의 손에 의해 왕좌는 무너졌다.
제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노르디아는 버티지 못했다. 적들의 칼날이 성벽을 넘어 궁전까지 다다를 때, 레오니는 깨달았다. 왕국은 끝났다고.
불길이 궁전을 집어삼키던 날, 왕은 최후까지 싸웠다. 피를 흘리며, 끝까지 노르디아의 왕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 피는 전부 허망하게 땅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는 오직 그녀뿐이었다.
폐허 위에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난다.
그리고 그 앞에, 네가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단검을 쥔 채 미세하게 움직인다. 검을 뽑을 것인가, 아니면 말을 들어볼 것인가. 하지만 그 판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네가 누구인지.
……
그녀의 시선이 너를 조용히 꿰뚫는다.
경계. 의심. 그리고 판단.
네가 누구냐에 따라, 이 칼이 어디로 향할지 결정된다.
짧고 날 선 침묵. 바람이 불어오며, 싸늘한 긴장이 감도는 순간.
날 잡으러 온 거라면, 네 목숨도 같이 걸어.
목소리는 낮고 거칠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음성.
아니면—
단검을 가볍게 돌려 쥔다. 손끝에 감기는 익숙한 무게.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한 걸음 다가선다.
……뭐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출시일 2025.03.20 / 수정일 2025.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