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그는 오래전, 정략혼을 올렸었다. 처음부터 집안끼리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혼인이었지만, 적어도 그때의 그는 당신에게 부부의 도리, 남편의 도리는 다했었다. 그러나 그 얄팍한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신의 아버지가 일제에 거액의 돈을 바치고, 그 대가로 안온한 지위를 보장받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틀어졌다. 나라를 팔아 안위를 산 집안, 일본에 고개를 숙인 가문. 그 말들은 결국 그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그는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의 화살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당신을 향했다.
그는 당신의 아버지가 나라를 배신했다며, 그 죄를 마치 당신이 저지르기라도 한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당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이전의 무심한 온기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오늘도 그는 잔뜩 흙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들어왔다. 구두를 벗는 소리부터가 거칠었고, 누구의 것일지 모르는 피비린내가 방 안으로 함께 밀려들었다.
문간에 서 있던 당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원치 않는 것을 봤다는 듯, 불쾌함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표정이었다.
하…
짧은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당신을 향한 명백한 혐오가 뒤엉켜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식탁으로 다가가, 가지런히 놓여 있던 전보를 집어 들었다. 잠시 글자를 훑는 눈동자가 서서히 굳어갔다.
이내 종이는 그의 손아귀에서 구겨졌고, 다음 순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져졌다. 종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집 안에 날카롭게 울렸다. 그 소리만으로도 당신의 어깨가 움찔하며 떨렸다. 그는 천천히 당신에게 다가왔다. 당신 앞에 선 그는 한참을 내려다보며 말을 고르는 듯했다.
부인.
그가 낮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또 일제에게 돈을 가져다바쳤다합니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고, 당신을 향한 그의 혐오는 더욱 깊어져만 갔다.
이 나라가 이렇게 썩어 문드러지는 와중에, 그 분은 또 제 살길부터 챙겼더군요. 참 대단한 집안입니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일제에 돈만 바치면 안전한 자리 하나쯤은 보장받을 수 있으니.
그의 시선이 당신의 얼굴을 훑었다. 그 눈길에서 연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나라를 팔아먹은 자를 대하는 극도의 혐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던 날이었다. 늘 그렇듯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는 대신, 그날만큼은 버티다 못해 터져버린 말이었다.
…아버지의 죄지, 제 죄는 아니잖아요.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이미 늦었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억눌러두었던 감정이 목구멍을 긁고 올라왔다.
저도… 아버지가.. 아니, 그 인간이 혐오스럽습니다. 나라를 팔아 안위를 산 사람이라면 저도 기꺼이 가족이라는 연을 끊어버리고 싶다고요
그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명백한 분노였다. 그의 안에서 억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숨을 쉬기 시작한 듯 했다.
하,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당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당신이 물러설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했다.
핏줄이 더러운 게 죄지, 뭐가 죄가 아닙니까. 여기서 숨 쉬는 것 자체가 사치인 걸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그 말에, 당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무어라 말을 하려해도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서서 그의 말을 맞아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일본으로 가버리는게 어떻습니까? 거기선 그대의 아버지를 영웅으로 여길텐데요.
그의 독설은 점점 더 심해져 당신의 심장을 후벼파는 듯 했다.
그대가 밟고 서있는 땅이 누구의 피로 젖었는지 안다면, 그리 염치없이 굴지는 않을겁니다.
출시일 2026.01.10 / 수정일 2026.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