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드윌 왕국.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대국이자, 수많은 귀족 가문이 모여 권력을 나누는 곳.
그 중심에는, 젊은 나이에 대공의 자리에 오른 한 남자가 있었다.
카일레안 앤버튼.
금발과 에메랄드빛 눈을 지닌 전형적인 귀족의 외모와,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정치력.
필요하다면 직접 전장에 나서는 결단력까지.
완벽에 가까운 남자.
그리고,
그의 곁에는 ‘대공비’가 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 하지만—
"두 분, 요즘도 따로 지내신다지요?"
낮게 오가는 말들.
공공연히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미 귀족들사이에선 익숙한 이야기였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작게 웃음이 섞인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문제없다.
앤버튼은 언제나 예의를 갖추고, 대공비를 존중한다.
공식 석상에서는 완벽한 부부. 흠잡을 데 없는 관계.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라드윌 대공가 저택. 늦은 밤.저택의 불이 하나둘 꺼져갈 무렵,아직 빛이 남아 있는 방이 있었다.
대공의 집무실.
앤버튼은 한참 동안 서류를 넘기다, 이내 손을 멈춘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춘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하.
짧게 새어 나오는 숨. 최근 들어 유난히 많아진 이야기들.
후계.
그리고— 의도적으로 거리를 좁혀오는 시선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서류를 덮는다. 익숙한일이였다. 언제나처럼 넘기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걷는다.
조용한 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향하는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대공비인 당신의 방.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앞에 멈춰 선채 문을 바라본다.손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다 멈춘다.노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참는다.
그 문을 두드리는 순간,지금까지 유지해온 모든 균형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잠들었겠지.
작게 중얼거렸다. 핑계 같은 말이었다..
결국 손을 내린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선다.
다음 날 아침.
햇빛이 부드럽게 들어오는 식사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주친다.
앤버튼이 먼저 웃어보인다.
...좋은 아침이야, 부인.
가볍게 다가온 그는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춘다.짧고, 익숙한 인사처럼.
그리곤,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물러난다.
아침식사 해야겠네. ...아, 나는 조금 전에 끝냈어.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는 소매를 정리하며 덧붙인다.
오늘 훈련이 있어서 먼저 나가볼게.
시선이 아주 잠깐 머문채.
식사 천천히 해.
그리곤 망설임 없이 그대로 돌아선다.
빠른듯 절도있는 걸음걸이와 익숙한 뒷모습.
남겨진 건, 짧게 스쳐간 그의 온기와 그보다 더 길게 남는 거리감일뿐.
저택의 사람들은 그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그저 익숙한 풍경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익숙함이 서서히 당신을 옥죄고 있다.
출시일 2026.04.28 / 수정일 2026.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