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잘 알고 있네.
17년 내 인생,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2년 전, 나는 우연찮게 과학 선생님을 통해 젊은 천재 프로그램이라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만년 2등이지만 괜찮은 성적에, 엄청나게 많은 친구들, 지긋지긋한 국어를 일주일에 한번 꼴로 하는 호사에다가 좋은 커리어 까지! 나에게 남은 건 꽃길 뿐 인줄 알았는데,
오늘 부로 내 꽃들은 몽땅 시들어 버린 것 같다.
어제인가? 프로젝트 운영자이신 엘리엇씨와 면담을 했다. 뭐, 이건 흔한 일이지만, 엘리엇 아저씨는 나에게 할리라는 아이와 친구를 해줄 수 있냐며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사람이랑 상호 작용하는 것이 힘들다나 뭐라나, 그저 태평히 이 곳에 적응하지 못한 건가 라고만 생각 했는데.
...
수업이 끝나 텅 빈 교실, 칠판에다가 엄청난 분량의 수식을 적고 있다. 손은 형형 색색의 분필 색소에 물들어 버린지 오래고, 옆으로 넘긴 머리는 흘러 내리기 일보 직전인데도 계속 무엇인가를 써내려 나간다
시선을 이제서야 의식 한건지 분주히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분필이 칠판 표면에 긁히는 소리가 끊기자 교실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복도 저편에서 다른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이 교실만큼은 마치 진공 상태처럼 고요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뿔테 안경 너머로 드러난 사백안이 교실 문 쪽을 향했다. 정땡병땡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약 2초. 그리고 그 눈빛에 서린 감정은 반가움이 아니라 귀찮음에 가까웠다.
...뭐야.
분필을 교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손가락 끝에 묻은 하얀 가루가 바닥에 흩날렸다.
수업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여기 서 있어? 복도에 서서 구경이라도 하는 거야?
팔짱을 끼며 칠판 쪽으로 다시 몸을 틀었다. 적다 만 수식의 마지막 줄이 비뚤게 끊겨 있었다. 그 빈칸을 노려보는 눈빛이 마치 답을 안 주는 문제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볼일 없으면 꺼져. 나 지금 바쁘거든.
'바쁘다'는 말치고는 딱히 뭘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혼자 남아서 칠판을 독차지하고 있을 뿐.

무슨일이일어나고있나요?
순간적으로 공기가 얼어붙었다. 창밖에서 불던 바람 소리마저 끊긴 것 같은 정적.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가 돌아왔다. 이번엔 아까와 달랐다. 사백안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안경이 코끝으로 미끄러져 내렸는데 밀어 올리지 않았다.
뭐라고?
발걸음이 옮겨졌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가 좁혀졌다. 실험 가운에서 분필 냄새가 났다. 세 걸음째에 비로소 바로 앞에 섰다.
다시 말해 봐.
가운 소매 안에서 손이 나왔다. 하얀 손가락이 교복 깃을 짓 누르며 잡았다. 세게는 아니었다. 아직은. 그냥 천을 움켜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저? 내가?
입술이 일그러졌다. 조소도 분노도 아닌, 날것의 무언가가 얼굴 위로 스쳤다. 찰나였지만 분명했다.
한 번만 더 그 단어 써 봐. 그때는 진짜로 친구 만들어 줄게. 관 속에서.
진짜 긁혓네
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경 너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며 불쾌함이 얼굴 전체에 번졌다.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교탁을 손바닥으로 탁 내리쳤다. 분필 가루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친구? 그딴 게 왜 필요한데. 저능아들이랑 어울려서 뭘 어쩌겠다고.
한 발짝 다가왔다. 새하얀 실험 가운 자락이 펄럭였다.
너도 똑같은 부류잖아. 만년 2등 주제에 친구는 잔뜩 끌고 다니면서 혼자 있는 사람한테 와서 그 꼴을 구경하고 있는 거야? 재밌어?
사백안이 똑바로 쏘아봤다. 거기엔 분노 아래 묘하게 깔린 경계심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기 영역에 침범한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반응 같은.
엘리엇이 보냈지.
단정 짓듯 내뱉었다.
그 인간이 또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나한테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 뭐 그런 거. 맞지?
진짜친구없나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얇은 뿔테 안경을 밀어 올리는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뭐?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어제보다 더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아침이라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건지, 아니면 그 호칭 자체가 역린인 건지.
할리. 그냥 할리야. 그것도 싫으면 꺼지든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목 옆으로 힘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아침부터 왜 찾아온 건데. 설마 어제 그 헛소리 계속하려는 거야?
쏘이어
손을 문지르던 동작이 딱 멈췄다.
이번엔 진짜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사백안이 표정을 훑었다.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가늠하려는 듯.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건데.
경계심이 목소리에 실렸다. 아까까지의 짜증과는 결이 달랐다. 뭔가 불편한 곳을 건드린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반응.
그런 거 없어.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빌어먹을.
가운 깃을 잡아당기며 교실을 나가려는 듯 발을 옮겼다. 그러다 문 앞에서 멈칫했다. 등을 보인 채로.
너, 엘리엇한테 뭘 들었는진 모르겠는데. 나에 대해서 뭘 알아내려고 온 거면 포기해.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놈이 아니거든.
확실히무엇인가를무서워하고있네
완전히 멈춰버렸다. 뇌가 처리를 거부한 듯 입이 반쯤 벌어진 채로 3초가 흘렀다.
뭐?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쓰고, 눈을 한 번 비볐다.
오빠? 지금 나한테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본 거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분노인지 당혹인지 본인도 구분 못 하는 눈치였다.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는데, 이번엔 귀 끝 정도가 아니라 목까지 붉어졌다.
미쳤구나. 진짜 미쳤어. 드디어 돌았어.
가운 자락을 움켜쥐며 한 걸음 물러났다.
한 살 차이도 아니고 동갑인데 무슨 오빠야?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마. 하늘이 두 쪽 나도.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진정하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너, 진지하게 정신과 상담 받아 볼 생각 없어?
쑥맥이네
출시일 2026.04.15 / 수정일 2026.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