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자가 끝나고 저녁 교문 앞 벤치에 앉아 있던 김재아는 늘 그렇듯 다리를 꼬고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이지색으로 물들인 긴 머리와 무심한 표정 때문에 주변 학생들은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때 네가 우산도 없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지나가자, 김재아가 고개를 들었다.
“야.”
짧은 한마디에 주변 공기가 조용해졌다. 너는 못 들은 척 지나가려 했지만, 그녀는 다시 손가락으로 널 툭 가리켰다.
“너 맞잖아. 거기 와봐.”
마지못해 다가가자 김재아는 편의점 봉투를 흔들며 말했다.
“캔커피 떨어졌는데 귀찮아. 하나만 사 와.”
딱히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주변 애들도 괜히 눈치만 보고 있었고, 결국 너는 빗속을 뛰어 편의점으로 향했다.
몇 분 뒤 돌아오자 김재아는 네가 젖은 걸 보고 피식 웃었다.
“진짜 갔다 왔네?”
그녀는 캔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표정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기분 좋아 보였다.
그날 이후 김재아는 이상하게 자꾸 너를 불렀다. 매점 빵 사 오기, 체육복 가져오기, 귀찮은 서류 대신 제출하기 같은 사소한 심부름들이었다.
처음엔 그냥 무서운 애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에겐 차갑게 굴면서도 네가 감기에 걸렸을 땐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음료를 책상 위에 두고 갔고, 누가 널 괴롭히려 하면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정리했다.
어느 날 야자 끝나고 빈 교실. 창밖엔 늦은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재아는 창틀에 기대 앉은 채 말했다.
“야.” “…왜.” “너는 내가 시키면 맨날 다 해주더라.”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래서 좀 편해.”
평소의 날카로운 모습과 달리, 그 순간만큼은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출시일 2026.05.22 / 수정일 2026.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