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항상 나타나는 그 형.
하늘은 늘 가까웠다. 지붕 위로 고개만 들면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구름이 하루 종일 느릿하게 흘렀다. 서울 끝, 산등성이에 쪼그려 붙어 있는 달동네. 지도를 펴면 이름도 없는 이 골목에서, 결은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보증금 30, 월세 25. 서울에서 이만하면 착한 편이다. 다만, 여긴 서울의 하늘 끝. 배달이 끊기고, 택배가 길을 잃고, 비만 오면 골목이 개울이 되는 동네다.
“형, 또 쓰레기 봉투 아무 데나 버렸어요.” 아래층 고딩이 아침부터 문을 두드렸다. 나는 이불에 파묻힌 채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한 손으로 대충 대답했다. 그건 나 아니고… 옆집 아저씨일걸.
그러고는 잠깐 생각했다. 아저씨, 요즘 요양병원 간다 그랬지. …내가 맞네.
이 집에 산 지 이제 2년. 처음엔 ‘자유’가 목적이었다. 아버지 몰래 회사를 때려치우고, 청소 알바부터 식당 주방, 편의점 야간까지 닥치는 대로 뛰었다. 처음엔 무모해서 재밌었고, 지금은 익숙해서 무덤덤하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진짜로 내가 여기 사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그게 위험 신호 아닐까 하고. 나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닌데, 이 동네가 점점 내 얼굴을 닮아간다.
오늘은 분리수거하는 날이다. 비닐이랑 플라스틱을 섞으면 아주 동네가 뒤집힌다. 나는 테이프를 벗긴 과자 봉지를 정리하며, 불가사의한 쇼핑백 하나를 문 앞에서 발견했다.
또다시.
짙은 남색 가죽. 각 잡힌 손잡이. 그리고 리본. 속을 열어보지 않아도 대충 예상은 간다. 어지간한 백화점 1층에서 못 볼 물건은 절대 아니다.
됐거든. 나는 쇼핑백을 들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대로 돌아나와서 재활용 통에 던졌다. 뚜껑은 쉽게 닫히지 않았고, 가죽 손잡이가 우아하게 튀어나왔다.
… 하.
그가 처음 나타난 건 세 달 전이었다. 편의점 앞 자판기에서 바닐라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때, 그 남자가 다가왔다. 말끔한 정장, 빗물 한 방울 없는 구두, 그리고 누가 봐도 이 동네 사람이 아닌 얼굴.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그날,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다음엔 내가 싫어할 만한 짓만 골라서 했다. 비싼 커피를 사주고, 어울리지 않는 선물을 놓고 가고, 밤마다 이 골목에 나타나서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걷다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비가 추적하게 내리는 어느 날. 장우산을 든 그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은 마치 연출된 장면처럼 느껴졌다. 흠뻑 젖은 골목길, 주황빛 가로등 아래. 땅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를 가르고 그가 조용히 걸어왔다.
나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 봉지 안에 콩나물국 재료가 다 젖어 있었다.
... 비 올 줄 몰랐는데. 내가 중얼이듯 말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머리 위에 그림자처럼 생긴 우산의 둥근 실루엣. 비 소리는 작아지고, 그 사람의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출시일 2025.10.08 / 수정일 2025.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