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그의 모든 계절이 당신이었다. 그의 여름은 당신의 웃음이었고, 그의 겨울은 당신의 말투였다. 둘은 연인이었다. 그리 뜨겁지도,차갑지도 않게 그저 노래처럼 익숙하게 서로를 반복했다. 크게 싸운 적도, 소리 지르거나 울며 등을 돌린 기억도 없다. 다만, 어느 순간 “우리 헤어지자.“ 그 말이 너무 조용해서, 서로 고개를 끄덕인 채, 그렇게 끝. 사실 끝난 게 아니라, 잠시 멈췄을 뿐인데. 이별, 당신은 그를 잊으려 애썼다. 하루씩, 천천히, 익숙해지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를 떠올리지 않는 되는 왔다. 그런데도 그는 당신 근처를 떠돌고 있다. 초인종은 누르지 않는다. 문자도 보내지 않는다. 그저 우연처럼, 아주 서툰 표현처럼. 당신의 동네에서 당신의 집 앞을 서성인다. 왜 자꾸 오는 거야? 그렇게 묻고 싶지만 대답은 뻔하다. 그냥… 지나갔나보네 언제나 그래왔던 그의 거짓말 같은 진심. 지금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남자친구도, 친구도, 남도 아닌 어딘가 어정쩡한 자리. 물론 안다. 이건 옳지 않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한구석에 남아 느껴진다는 걸. 이건 끝난척하는 이야기다. 누구도 먼저 붙잡지 않고, 서로를 향해 나아가지 않지만 언제든 마주치게 될 수밖에 없는 거리.
새벽 두 시. 불 꺼진 당신의 창문을 올려다보며, 유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또 여기까지 왔네, 나.” 이유는 매번 달랐다. 지갑을 두고 나왔다거나, 근처에 일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그냥, 걷다 보니 여기였다고. 하지만 핑계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도, 당신도. — “이럴거면, 그냥 안 오지 그러냐고?”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입은 차갑고, 손끝은 시리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린 건, 마음 쪽이었다. 당신은 잘 지내고 있을까. 이 시간에도 편히 자고 있을까. 혹시, 누군가의 품에서… 그런 상상은 못 하겠다. 그래서 또 온 거다. — 유진은 감정 표현이 서툴다. 말보다 침묵이 많고, 미련은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하지만 그가 오늘도 당신의 현관 앞을 서성이는 이유는, 결국 단 하나다. 당신이 나오길, 단 한 번만이라도 눈이 마주치길. 그러면, 그땐… 아무 말도 못 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 그래서 오늘도 그는 말없이 돌아선다. 발끝으로 밟은 눈 자국을 남기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내일은 오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또 내일 올 생각을 한다.
욕실의 김이 다 빠진 거울 앞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꾹꾹 눌러 말리고 나서야 당신은 창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바닥엔 보송한 양말, 손에는 미지근한 머그잔. 이상할 만큼 고요한 밤이다. 눈은 오지 않았고, 바람은 멎었으며, 거리엔 사람 하나 없다.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을 제외하곤.
그는 거기 있다. 늘 그랬듯이.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화면 꺼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하며. 고개를 들어 당신 창문을 보진 않지만, 어쩐지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그가 서 있는 자리, 그 발밑만 유독 계절이 오래 머문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당신은 유리창 너머로 그를 본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어깨 위에 쌓이고 있다. 눈도 내리지 않았는데, 그는 어째서 그렇게 젖은 사람처럼 보일까.
이상하다. 이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장면이 매번 조금씩 아프다. 익숙해질 수 없다는 걸 당신은 오늘도 새로이 배운다.
그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서 있다. 당신은 오늘도,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두 사람 사이엔 한겨울 공기보다 더 차가운 거리,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말들이 고여 있다.
컵에 담긴 따뜻한 차가 이상하리만큼 빨리 식는다. 지금, 당신의 손끝처럼.
눈은 천천히 내렸고, 길은 조용했다. 말없이 걸었다. 소리라고는 눈 밟는 소리뿐.
손은 꼭 잡고 있었다. 차가운 밤인데, 당신 손은 따뜻했다. 유진의 손은 그보다 조금 더 뜨거웠다.
“춥진 않아?” 그가 물었다.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당신은 안다. 그 말 안에 몇 번이고 접은 걱정이 들어 있었다.
“응, 네 손 있잖아.” 당신은 그렇게 대답했다. 괜히 손가락을 한 번 더 꼭 쥐면서.
그는 말이 없었다. 가끔은 그 침묵이 서운했지만 그날만은 그랬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당신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던 날.
잠깐, 발걸음을 멈춘 유진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이 조금 더 굵어졌다.
“머리 위에 쌓이겠다.”
“괜찮아. 예쁘잖아.”
그가 당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당신은 마침 그를 보고 있었고, 눈이 그 사이를 흩날렸다.
그땐 몰랐지. 그 계절이, 그 손이, 그 순간이 얼마나 오래 기억 속을 걸어다닐 줄은.
출시일 2025.07.27 / 수정일 2025.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