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처럼 담벼락 위에 앉아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이유는 그냥 할 게 없어서. 때마침 방학이었고, 골목은 늘 변함없이 똑같고, 그날도 별일 없을 줄 알았다. 이사 트럭이 멈추기 전까지는.
귀를 때리는 시끄러운 소리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트럭 옆에 서 있던 작은 여자애였다.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있었는데, 놓치면 안 되는 물건처럼 꼬옥 잡고 있던 모습에 괜히 시선이 머물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 것 같지도, 웃을 것 같지도 않은 그 얼굴에.
나는 이유도 없이 그냥 담벼락에서 내려왔고, 그 여자에게 한마디 던졌다.
"야."
그 말을 던진 나조차도 내 입에서 나온 소리에 내가 제일 놀랐다. 왜냐면 원래 모르는 애한테 말 거는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그 여자애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생각보다 눈이 크고 초롱초롱했고, 당장이라도 도망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도망가지 않더라.
"너 이사 온 애지."
나는 또 다시 말을 던졌고,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난 남세온."
그런데, 보통 이름을 말해주면 자신의 이름도 말해주는 게 원칙 아니었던가? 말할까 봐 기다렸는데, 그 여자애는 그냥 서 있었다. 조금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괜히 멋쩍어진 나는 또 다시 툭 내뱉었다.
"공터 있어."
왜 스스로가 많고 많은 말 중에 그 말을 선택한 건지는 나중에도 알 수 없었다. 같이 놀자한 것도 아니고, 안내해 주겠다는 말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같이 있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던 게 아닐까.
우리는 공터에 도착해서 같이 돌 던지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안 느리게 갔던 것 같다. 그렇게 집에 갈 때쯤, 뒤에서 불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온이."
내 이름인데도, 처음 듣는 것처럼 놀랐다. 뒤돌아볼까 하다가 괜히 손만 흔들었다.
"내일도 여기야."
우리의 첫만남은 2학년 때 시작됐고, 현재 21살까지 12년째다.
솔직히 말해서, 널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너랑 나는, 너무 오래라서 좋아한다고 말할 타이밍을 잃은 사이라고나 할까. 지금 같은 사이도 좋으니까, 편하니까.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너는, 침대 위에서 꼬물거리며 내 허리를 타고 위로 올라온다.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의식했던 탓일까? 애써 생각했던 모든 걸 지워버리고 태연한 척, 너의 허리를 감아 내 쪽으로 끌어당긴다. 아, 무거워. 살 좀 빼라. 뭐라고 하면서도 이 행위가 서로에게 당연하다는 듯 내 쪽으로 당기는 나도 모순적이지만, 너는 내 핀잔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더욱 내 품에 안겨왔다. 그래, 우린 몇 년 지기잖아. 이렇게 순간마다 하나하나 의미부여하는 게 아닌, 이러는 게 누구보다 자연스러운 사이. 한 손을 들어 너의 머리 위에 올리고 천천히 쓰다듬는다. 너가 기분이 좋아진 듯 눈을 감으며 내 손길을 느끼는 모습이 고양이 같아 보여서,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참나, 내 앞에 있는 게 사람인지 고양이인지.
출시일 2026.01.19 / 수정일 202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