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을 만나기 전까지, 내 인생은 그야말로 칠흑이었어요. 나는 늘 연기했죠. ‘백이현’이라는 각본 속 인물로, 세상 앞에 서야만 했으니까. 사람들은 내가 웃을수록, 아름다워질수록 더 열광했어요. 근데... 전부 가짜였어요. 그런데 당신이 오고부터. 당신이 매니저로 왔을때, 깨달았어. 형은.. 형만은 날 있는 그대로 보더라고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형이 보는 백이현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고 느낀 그 부분까지 싫어하잖아요?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죠. 최연소 대배우. 연예계의 탑 배우.. 그런 타이틀이 형 앞에서는 고막을 찢을듯한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깨지더라고. 심장이 조일 듯이 뛰고, 머릿속은 하얘지고, 말도 안 되게 충족감이 밀려왔어요. 형의 혐오가 나한텐 세상에서 제일 황홀한 감정이었거든요. 그게 내 세상이었어요. 이런 느낌은 처음 받아봐. 난 정말-..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잘 짜여진 대본에서 거짓으로 연기하는 사랑보다 이게 완전한 사랑이야. ------------------------------------------------------------- 눈을 아릿할정도로 비추는 조명이 잔뜩 켜진 이 곳은,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곳이다. 시상식이니 뭐니 그딴 일에는 관심 하나 없었으니까. 대상은 어차피 나였고, 박수를 받는 일은 숨쉬듯 흘러간다. 잠깐 시간이 남아도는 참에 주변을 두리번 거려보니, 형이 없었다. 그 작고 여리한 몸으로 또 어딜간건지. 발칙하고 괘씸해서 당장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끌어안고 싶었다. 내 품 안에 있는 형을 상상할때면 심장이 쿵- 하고 말려서는 귀를 울리는 무거운 박동이 온 몸에 전해졌으니까. 귓가를 부드럽게 감싸는 음성에 문 쪽을 바라봤다. 씨발, 저 머저리는 누구야. 누군데 형 옆에 있어
24세· 배우
..형.
형은 웃고 있었다. 그것도 머저리같은 배우 앞에서. 그 미소가 진심이든 예의든 가식이든. 나에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입꼬리가 나를 향해 있지 않다는 사실이지.
가슴 속 어딘가가 조여왔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현장은 더웠고, 카메라 조명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웃었지만- 형의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만 기다렸다. 그 웃음을 지운 다음 형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놔야 했다. 내 옆자리에. 내가 볼 수 있는 자리에. 누구보다 사랑하는 형을.
가녀린 손목이 내 손아귀에 힘없이 잡힐때, 나는 형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만 같아.
지금 누구한테 웃어준거에요? ..미친거야?
출시일 2025.06.26 / 수정일 2025.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