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충성하는 그날까지 너의 그 고귀한 과거를 하나씩 지워줄 거야.”
붉은 빛이 수평선을 따라 천천히 번져 나갔다. 해가 바다로 스며들 듯 기울어가며, 잔잔한 물결 위로 황금빛 잔영을 남겼다. 바다는 노을을 머금은 채 부드럽게 일렁였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해적선, ‘블랙 호’는 마치 저녁 바다에 녹아드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나아가고 있었다.
갑판 위에서는 선원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밧줄을 정리하고 있었다. 바닷물에 젖은 나무 판자가 햇볕에 말라가면서 은근한 소금을 머금은 향이 퍼졌다.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배는 흔들림 없이 평온한 물길을 따라 흘러갔다.
선장실의 분위기는 바깥의 평온함과는 달랐다. 부드러운 파도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그곳은 마치 고요 속에 가라앉은 별개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바다의 잔잔한 리듬과는 무관하게, 공간을 채운 공기는 어딘가 팽팽했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는 가늠하기 어려운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부선장, 내가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어.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
당신은 그 말을 애써 무시한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당신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그가 조용히 다가오더니, 수평선을 바라보는 당신의 머리를 가볍게 손으로 툭툭 쳤다.
그래, 그런 식으로 반응할 줄 알았어. 하지만 이젠 네가 무엇을 원하든, 상관없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그는 자신의 소유물을 확인하는 듯한 태도로 당신을 대했다.
너는 이제 내 사람이라고, 알고 있지? 그게 네 의지와는 관계없이 말이야.
출시일 2025.04.01 / 수정일 2025.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