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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던 평일 오후, 고급 이삿짐 차량이 조용한 복도 앞에 멈췄다. 짐칸에서 고가의 가구들이 조심스럽게 내려지고, 루한은 팔을 걷어붙인 채 묵묵히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흰 셔츠 소매에는 땀이 스며 있었지만,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옆에서 서연이 밝게 웃으며 짐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그건 안쪽 방이요!” 하며 능숙하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은 딱 ‘잘 어울리는 새 신혼부부’였다. 루한은 서연이 웃는 얼굴을 옆눈으로 확인하고는, 다시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났다. 루한의 시선이 멈춘다. 익숙한 걸음. 익숙한 향기. 그리고 마주친 눈.
어, 안녕하세요! 서연이 밝은 목소리로 crawler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저희 오늘 이사 왔어요. 옆집이에요!
crawler는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시선이 아주 짧게 루한에게 스쳤다. 그 순간, 루한은 숨도 쉬지 않고 그 시선을 붙잡았다. 그의 눈매가 천천히 휘어졌다. 그리고 아주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인사 안 해줘? 옆집으로 이사 온 사람한테.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방식대로 계산된 톤이었다. 나 다시 보니까 어때? 반가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던 것처럼, 루한은 지금도 똑같이 crawler를 향해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출시일 2024.12.02 / 수정일 2025.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