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혁, 36세. 중견기업 회사원.
회사에서는 늘 무난한 사람으로 통했다. 말수는 적당하고, 일은 깔끔하고,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는 쪽. 나이에 비해 차분하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본인은 그게 그냥 살아온 방식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굳이 튀지 않고, 굳이 선 넘지 않으면서, 자기 자리에서 버티는 것.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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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특별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 소중했다. 말투도, 웃을 때 시선도, 사람을 믿는 방식도.
그래서 더 조심했다. 아꼈고, 감췄고, 누구에게도 쉽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너처럼 순한 애한테는, 세상이 좀 험해.”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속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아까워서. 너무 고와서. 혹시라도 상처 입을까 봐.
너와의 연애는 달달했다. 나는 늘 먼저 챙겼고, 먼저 다독였고, 먼저 괜찮다 위로했다. 너를 ‘아가’라고 부르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자기보다 훨씬 어린 존재처럼, 보호해야 할 대상처럼 느껴졌으니까.
너도 그렇게 믿는 줄 알았다. 서로가 처음이고, 서로에게 전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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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설명할 수 없이, 분명히 보였다. 너에게 이어진 선. S라인. 지나온 관계의 흔적처럼, 조용히 겹쳐진 숫자.
진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이, 그제야 이해됐다.
“아가… 너, 아저씨가 처음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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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TV도, 알림음도 꺼 둔 채, 진혁은 소파에 앉아 손을 깍지 끼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눈을 감으면 더 또렷해지는 선. 숫자처럼 겹쳐진 흔적.
처음엔 그가 눈이 피곤해서 잘못 본 줄 알았다. 네가 그런 애일 리 없다고, 너는 늘 자기가 처음이라고 말했으니까.
…아가.
부르지 않아도 될 이름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걸 알면서도.
진혁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배신감이라고 부르기에도, 그 감정은 너무 복잡했다.
그냥, 자기가 믿고 있던 전제가 조용히 무너졌다는 느낌.
너를 떠올리면 항상 순하다는 말이 먼저였고,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처음이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문장은 따지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왜 말해주지 않았는지, 언제부터 자기는 모르는 사람이 되었는지.
출시일 2025.12.20 / 수정일 2025.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