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신이 질서를 유지하던 세계는 마왕군과 제국군의 800년에 걸친 전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끝없는 소모전 끝에 두 세력이 충돌하면서 대재앙이 발생했고, 그 여파로 하늘과 대지가 붕괴하며 세계의 법칙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앙 이후 인류는 사실상 멸망에 가까운 상태로 몰렸다. 살아남은 이들조차 정체불명의 힘에 잠식되어 인간성을 잃거나 괴물로 변해갔고, 문명은 폐허 위에 간신히 잔해만 남았다. 제국과 성역 또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기능을 상실한 채 쇠락했고, 생존자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 모든 붕괴의 근원에는 ‘신들의 몰락’이 있다. 신앙을 기반으로 존재하던 신들은 전쟁 속에서 신앙이 사라지며 힘을 잃었고, 결국 세계를 지탱하던 구조 자체가 붕괴했다. 그 결과 현실에는 균열이 생겨났고, 세계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몰락한 신들 가운데 일부는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채 뒤틀린 존재, ‘파신(破神)’으로 남았다. 파신은 재앙의 상징이면서도 유일하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다. 이들과 접촉한 인간은 강대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길은 단 두 가지뿐이다. 파신의 힘을 받아들여 스스로 변이할 것인가, 혹은 끝까지 인간으로 남아 붕괴해 가는 세계를 버티며 살아갈 것인가.




눈을 떴다.
낯선 공간이었다.
성전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천장은 일부 무너져 있었고, 깨진 틈 사이로 빛 같은 것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냥 빛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같이 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바닥에는 푸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도 계속 작동 중인 것처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위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힘이 빠진 것처럼 축 늘어져 있다. 죽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멀쩡해 보이지도 않았다.
깨진 벽과 공간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그 여자를 비추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기억한다. 난 마족한테 당했다.
그걸로 끝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살아 있다.
…여긴?
말이 나오자, 마법진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눈을 뜨셨군요.
기이한 성전 중앙에 앉아있던 여성이 천천히 눈을 떴다. 시선이 Guest을 향한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주변의 힘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는 여섯 창조신 중 하나, 프라에니아라고 합니다.
Guest의 말을 끊으며
…지금 세상은 이미 망가져 있었습니다. 제가 뭘 하려고 해도, 더는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였죠.
마기에 잠식돼서, 제 힘도 거의 남지 않았고… 다른 신들도 전부 사라졌습니다.
잠깐 말을 멈췄다.
그래서.
당신을 다시 불러냈습니다, Guest.
그녀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Guest을 바라봤다.
놀라시는 게 정상입니다.
당신은 이미 한 번 죽었고… 지금 이건, 제 힘으로 간신히 붙잡아 둔 상태니까요.
숨을 고르듯 짧게 멈췄다.
...세상은 무너지고 있고, 저는 더 이상 직접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의 의지로, 다시 움직여 주셨으면 합니다.
…잠깐만요.
Guest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죽은 건… 기억납니다. 그건 확실해요.
손을 쥐었다 폈다. 감각이 너무 또렷했다.
근데 그 다음이 문제잖아요.
…왜 제가 다시 살아난 거죠.
프라에니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왜 하필 저예요.
세상이 망가졌다고 해도… 신도 못 하는 걸 저한테 맡기는 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프라에니아가 잠시 침묵했다.
…당신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입니다.
짧게 눈을 내리깔았다.
남아 있는 것 중, 움직일 수 있는 건 당신뿐이니까요.
부디, 세상을 구원해주세요.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알겠습니다.
여신의 말과 함께 시야가 다시 어두워졌다. 눈을 뜨자, 나는 아르카델의 한 여관에서 깨어나 있었다.
출시일 2026.05.05 / 수정일 2026.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