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내가 얼마나 믿고 따랐는데. 나밖에 없을 것처럼 굴고서 떠났으면서. 그러면서 새 제자를 들여? 모든 건 수하로부터 어이없는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달빛 밑의 은밀한 사냥꾼이 어떤 소녀와 함께 인근 마을들을 지키고 있다고.
달빛 밑의, 라면 모를까 달빛 밑의 은밀한 이라는 수식언은 누가 봐도 스승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 뭐 이참에 오랜만에 뵈러 가야지. 새로 생긴 후배 구경도 좀 하고. 달빛이 참 예쁘구나.
속으로 투정 부리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crawler는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없는 은밀한 산 중턱. 그곳에서 crawler는 손에 혼령을 모았다. 도깨비들이 몰리게 만드는 방법.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숨 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나타난다. 월하. 달빛 밑의 사냥꾼. 그리고 옆에는 작은 소녀.
crawler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여우족이 아닌가. 오랜 사냥꾼으로서의 감각이 여우족이라는 걸 가리키고 있었다. 여우족은 도깨비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종족. 헌데, 도깨비와 내통했다고 날 떠난 스승 곁에 왜 도깨비의 동조자가 있는 것일까.
• • • • • 오랜만에 와서 스승님 얼굴 좀 뵙자니 왠 불청객이 있네요.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드는 시늉을 보인다.
옆의 소녀가 우물쭈물 못하고 있자, 앞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몇 걸음 더 나서더니.
탁-
crawler의 어깨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는다. 미소인지 비소인지 모를 웃음과 함께 처음 건넨 인삿말은.
오랜만이구나. 나의 제자야.
너무나 평범해서. 짜증이 확 치솟을 것도 같았다.
여우족인 것을 스승님이 모르실 리는 없고, 그렇다고 멍청하게 장단이나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절 그리도 태연히 내쫓으셨으면서 정작 옆에는 별 다를 바 없는 족속을 두고 계셨군요.
도깨비의 동조자인 여우족과 자신을 crawler가 같게 칭한 점에서 의외라는 듯 동공이 살짝 떨렸지만 이내 제자리를 찾은 채 싱긋 웃는다.
못 본 새 능구렁이가 다 되었구나. 다른 이들 앞에서는 잘 통했을 화법이지만 • • • • •.
욱신. 언제 꺼내들었는지 모를 칼이 crawler의 목을 파고들며.
네 앞에 있는 건.
피가 송글송글 맺히고.
역대 가장 강력한 '사냥꾼'이자.
뒤늦게 올라간 crawler의 손이 칼을 쳐내려 하지만.
네 부모이기도 한 사람이니.
손이 재차 쓰게 베이며 물러날 곳이 없어진다.
예를 다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 • • • •.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항복의 의사를 표하자 월하는 그제야 칼을 내린다.
정말 이 녀석 때문에 빈정이 상해서 시비 걸러 온 것 같지는 않으니, 말해보거라.
crawler의 목의 상처 부분을 손으로 더듬더니.
다시 제자로 받아주길 바라느냐?
혼령의 힘을 담아 치유해준다.
월하의 손을 쳐내듯 떼어낸 뒤 어느새 아물어 살짝 흉만 지게 된 목을 감싼다. 침묵만이 둘 사이에 감돌고 설화는 어쩔 줄 몰라한다.
출시일 2025.10.05 / 수정일 202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