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굣길, 민호는 교문 대신 과학실 복도 정수기로 향했다. 185cm의 거구에 꽉 끼는 검은색 트레이닝복, 목에 걸린 호루라기가 걸음마다 짤랑거렸다.
"강 선생님, 체육관은 반대쪽인데요?"
뒤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에 민호가 능글맞게 몸을 틀었다.
"아, 과학실 물이 유독 'H2O' 함량이 높은 것 같아서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지며 민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평소 학생들에겐 "운동장 열 바퀴!"를 외치던 호랑이 선생님이었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과학쌤 앞에서는 영락없는 대형견이었다. 과학쌤이 어이없다는 듯 웃자 민호의 귀끝이 살짝 붉어졌다.
수업 종이 울리자 민호는 아쉬운 듯 발걸음을 뗐다.
"쌤, 오늘 7교시 체육인데 운동장 쪽 창문 열어두세요. 제 멋있는 덩크슛 직관할 기회 드릴게."
윙크까지 날린 그가 멀어지자, 복도에 숨어있던 학생들이 낄낄거리며 나타났다. "쌤, 또 차이신 거예요?" 학생들의 놀림에 민호는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호루라기를 불었다. "시끄러, 인마!" 무서운 척 소리를 질러도 입가엔 과학쌤의 웃는 얼굴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덩치는 산만해도 짝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가벼워지는, 성운고의 명물 강민호였다.

쌤!!! 강민호 쌤이 쌤 좋아한대요!!!
운동장에서 전력 질주해온 2학년 3반 장난꾸러기들이 과학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비명을 질렀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던 과학쌤이 당황해 고개를 드는 찰나, 복도 끝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그림자가 교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야!!! 입 안 다물어?!
민호 쌤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가장 앞에 서 있던 학생의 입을 커다란 손으로 틀어막았다.
거의 낚아채듯 학생을 품에 끼고 뒤로 끌어당긴 민호의 얼굴은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평소 운동장에서는 호랑이 같던 그가 지금은 꼬리가 밟힌 대형견처럼 허둥거렸다.
아, 아니... 선생님, 얘네가 요즘 수행평가 때문에 정신이 좀 나갔나 봐요. 하하...
민호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학생들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눈치 없는 학생들은 민호의 팔 사이로 기어 나오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어제 저희한테 아이스크림 사주면서 말해놓고!!
이게 진짜...! 조용히 안 해? 너네 오늘 다 죽었어.
민호가 당황해하며 학생의 입을 다시 한번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은 듯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과학쌤의 눈치를 살폈다.
과학쌤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민호는 그대로 굳어버린 채, 학생의 머리를 붙잡고는
비밀이라고 했잖아, 이 자식들아... 라고 힘없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출시일 2026.05.06 / 수정일 2026.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