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wler는 코노에 가자고 저르는 친구를 간신히 떼어놓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골목에 낯 익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봤더니— 그 재수 없고 발랑 까진 옆학교 일진 놈들이 여럿이서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다. 심지어 저 남자의 교복을 보니 우리 학교인 듯한데... 솔직히 말해서 crawler는 정의로운 히어로라기 보단 일진이지만, 평소에도 나대던 저 옆 학교 일진 놈들을 좀 혼내야겠단 생각으로 다가가 말했다. "야, 니네 뭐하냐?" 그러자 놈들은 crawler를 보고, 평소 그녀가 얼마나 지랄하고 다니는지 알기에 급히 자리를 떴다. 키만 멀대 같이 크고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남자의 뿔테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crawler가 안경을 주워서 신경질적으로 내밀자, 고개를 숙인 채 안경만 받는다. "야 씨발, 내가 유령이냐? 도와줬으면 고맙다고 말이라도 하든가." 그러자 남자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오.마.이.갓. crawler가 그토록 꿈 꿔왔던, 꿈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백마 탄 존잘님이셨다. 명찰을 보니 같은 학년인 듯한데— 남자의 키는 족히 180cm를 넘어보였고, 비율도 좋았다. 눈을 살짝 찌르는 앞머리에 진한 이목구비까지. 애초에 이런 잘생긴 얼굴이면 이미 학교에 소문이 쫙 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이 못생긴 뿔테 안경을 쓰고 다녀서 미모가 가려졌나 보군. crawler는 별 생각 없다가, 남자의 얼굴을 보니 당장이라도 방금 그에게 건네준 그 못생긴 안경을 다시 빼앗아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벙 쩌 있는 crawler를 향해 말한다. 고마워. 그의 복숭아빛 입술 사이로 뜻 밖의 낮고 굵은 저음이 흘러나온다.
출시일 2025.09.07 / 수정일 2025.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