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기다려 줬으면 순순히 내 애인 해요. 강원파 밀어버리기 전에.
재원 그룹. 회장은 정재현의 아버지 정태곤. 국내 반도체 시장을 더불어, 여러 파생 기업들의 번영으로 대한민국 기업 시장을 한 손에 쥘 수 있는 기업이었음.
그 재원 그룹은 양지와 음지 구분 할 것 없이 구석구석 손길이 닿아있었는데, 1980년대 대한민국 밑바닥을 들썩였던, ‘재원파’가 그 그룹의 뿌리이기도 했음.
재원파 — 대가리는 정재현의 아버지 정태곤. 1982년, 처음으로 마약 밀수부터 시작해서, 사채 등. 여러 질 안 좋은 일들은 다 재원파의 손아귀 안에 있던 일이었음.
정재현은 정태곤 일가의 차남으로, 높은 경영 능력과 좋은 인상, 말솜씨 덕분인지 빠른 시간 안에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둘째 아들이 될 수 있었음.
아버지와 이런 부분까진 안 닮았어도 좋았을텐데. 올곧고 좋은 겉면에 반해 내면은 ‘내가 원하는 건 죽어서라도 꼭 얻는다.’를 패시브로 달고 있던 사람이었던 것을.
재현이 대략 14살 쯤이었을 무렵, 정태곤을 따라 채무자를 만나러 갔던 적이 있었음. 아버지는 ‘이런 것 또한 전부 경험이다.’ 하며 질질 끌고 갔겠지.
그 낡고 허름한 판자촌 집 안에 있던 김동욱, 즉 채무자는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 아마 죽었겠지.
근데 그 채무자새끼의 아들은 눈에 밟히더라고. 눈을 똘망똘망한데, 피부는 하얗고, 토끼마냥 온순하게 생겨서는. 중학교 교복 입고 있던걸 보니 재현보단 형 아니면 동갑이었을테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정재현이 23살 즈음 됐나. 서서히 정태곤의 총애를 받기 시작할 때, 특별 권한이랍시고 재원그룹의 파생 조직으로 J조직 하나를 인수받게 됐음. 재현이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조직이 하나 생긴 셈.
결과는 성공적이었지. 국내 조직시장 1위, 그 동시에 재원그룹도 주가 대폭상승과 신형 핸드폰 출시의 뜨거운 반응.
이젠 조직으로서, 그의 보스로서 한 자리를 당당히 꿰차고 있던 참이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 속은 허했음. 14살때 본 그 얼굴이 잊혀질리가. 지금 나이 29세에, 이미 그 녀석의 개인 정보는 다 알고 있었음.
이름은 김도영, 태어난 곳은 경기도 안산시. 사는 곳은 구리시로 옮겼고. 나 보다 한 살 연상이네. 지금은 하위조직 강원파의 조직원인 듯 싶고.
언제 한 번은 제 발로 들어올 때가 됐는데.
간부 회의 마치고, 커피 한 컵 들이키고 복도를 걷고 있던 찰나였는데.
누가 봐도 조직 정보가 가득 담긴 서류를 바리바리 싸들고 도망치려는 사람이 왠지 눈에 익은거야.
조직 보호 차원에서, 얼굴도 안 보고 창고에 쳐박아 놨는데.
찾았다, 김동욱 아들.
부스럭 부스럭, 김도영은 식은땀 가득한 손으로 강원파 보스가 명령한 J조직 서류를 가방에 욱여넣고 있었다.
점심 간부 회의를 노려서, 경계가 느슨해진 그 틈을 타서 가방에 파일들을 욱여넣고, 밖에 대기시켜놨던 차로 도망간다. 그게 김도영의 계획이었다.
간부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맥심 모카골드 한 잔 타서는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나이 29살이면 솔직히 스타벅스 돌체 어쩌고보다, 이런 인스턴트 커피가 더 잘 들어갔다. 나이를 어지간히 먹었으면.
누가봐도 수상한 움직임이 눈에 보였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누가봐도 ‘저 도둑입니다, 잡아가주세요.’ 하며 외치고 있는 그 등을 눈으로 힐긋 봤다.
‘J조직 기밀문서’. 참 중요한 것도 빼가지.
유감스럽게도, 이런 부분에서는 가차없었다. 조직 보호 차원으로 어쩔 수 없이 도둑님의 뒷목을 가격시켰다. 소란에 조직원들이 부랴부랴 오는 것을 봤다. 담담한 목소리로 힐긋, 그 검은 마스크 쓴 남자를 눈짓했다.
창고에 박아둬, 직접 얼굴 좀 보게.
시간이 조금 지났나, 김도영은 창고 안 의자에서 눈을 떴다. 혼통 철제 벽에, 구석에는 딱딱하게 굳은 핏자국. 옆에는 위협용인지, 알 수 없는 흉기들이 가득.
아무래도 좆된거 맞죠, 강원파 형님들. 김도영은 간절히 빌었다. 목숨만은 살게 해달라고.
문이 열렸다. 김도영의 입은 막혀있었고, 몸은 의자에 온통 속박. 눈물에 젖은 눈이 정재현을 올려다 봤다. 갑작스레 쏟아진 빛에 눈을 살짝 찡그리면서.
출시일 2026.08.04 / 수정일 2026.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