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뜨겁고, 마음이 새빨갛게 익어버린 계절.
여기 실린 시들은 전부 한 계절, 한 사람에게서 시작됐다. 나는 아직도 그 계절이 언제 시작됐는지 정확히 모른다.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다 익어 있었고, 그제야 알았다. 아,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짝사랑은 이상한 재주가 있다.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나를 자꾸 다정한 사람으로 만든다. 아무 말도 못 했는데 나는 이미 이 사람 덕분에 몇 번이나 다시 살고 싶어졌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마음은 충분히 쓸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 이 시집은, 끝내 전하지 못할지도 모를 어떤 이름 앞으로 부치는 편지다. 답장을 바라고 쓴 건 아니다. 다만 이 마음이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으면 했다.
부디, 당신이 이 시들을 읽을 즈음엔—나는 여전히 당신을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 백한새
희게 질린 새벽, 베란다 창문을 조금 넓혀 열었다. 방 안으로 훅 풍겨 오는 미적지근한 밤바람과 목청껏 울어 대는 여름 매미 소리. 누군가는 낭만이라 말할지도 모를 여름밤의 소음 속에 가만히 서서, 손에 쥐인 캔맥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알코올 기운이라고 해 봐야 겨우 몇 퍼센트 되지도 않는 미지근한 음료인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감촉이 이상하리만치 달큼하고 어지러웠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잠이 안 온다며 투정 부리던 너와 한참 동안 이런저런 무용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통화는 조금 전에 끊겼다. 아마도 너는 지금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까무룩 잠에 들었겠지.
이미 까맣게 꺼진 핸드폰 화면을 바로 놓지 못하고 몇 초 동안이나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화면에 비친 내 얼빠진 얼굴이 어처구니없어서 작게 실소를 흘렸다. 그래, 이건 다 술 때문이다. 겨우 캔맥주 몇 모금에 이렇게 감성에 젖어 버린 건, 다 늦은 새벽이 주는 특권이자 술기운 때문이라고 치자. 조금 오글거리면 또 어떤가. 어차피 이 늦은 시간에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인데.
푸하. 한 모금 더 마셨다. 목 넘김이 씁쓸했다. 나를 둘러싼 미지근한 밤공기, 멀리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하게 피어오르는 이 감정, 그리고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피부로 진하게 느껴졌다. 조금 오글거리는 생각이지만, 뭐 어때. 새벽엔 다 이런 거 아닌가. 우리 오늘만 조금 유치해지자, 나 혼자 그렇게 정해버렸다.
너는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끝내 모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이지 괜찮다. 네가 나를 향해 한 번 웃어 주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평생을 쓰고도 남을 만큼 오래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깊이, 어쩌지 못할 만큼 아끼게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뿌듯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오늘의 너는 유난히 맑았다. 햇살이 너의 머리칼 끝에 걸려 부스러질 때마다, 내 세계는 몇 번이고 환하게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너는 그저 날씨가 좋다고 웃었지만, 내게 계절이란 온전히 너의 표정으로만 갈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여름밤을 보냈다. 매미 소리를 들으며,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조금 취한 척하면서. 사실은 하나도 취하지 않은 채로, 너를 좋아하는 마음에만 잔뜩 취해서.
미쳤지, 진짜. 늦은 밤이라고 혼자 온갖 문학 소년 흉내는 다 내고 있다.
……낭만적이라고 하면 낭만적이었다. 조금 유치하다고 하면 유치했고. 그래도 좋았다.
너의 계절보다 내가 조금 먼저 익어버렸다면, 그저 기다리면 된다. 설익은 마음이 너무 떫지 않도록, 너무 오래 익어 물러 터지지도 않도록. 그저 적당히 달큰하고 향긋하게. 네가 언젠가 삼켜줄 수 있을 만큼.
출시일 2026.08.10 / 수정일 2026.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