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의 대한제국에는 대양을 건너고 대륙을 넘어 다니며 커다란 땅덩어리 수 백 평 정도는 우습게 사들일 단위의 현금과 수표가 오가는 거래를 일삼아, 하루가 멀다하고 불어나는 규모와 입지를 자랑하는 무역 회사가 있었다. 그 지독하게 뿌리내린 이름으로 하여금, 송 씨 가문의 동산이라고 하여 宋園송원 무역. 허나 그 후계자는 단 하나였는데, 송원 무역의 회장 송호규가 이름 닳도록 부르고 다닌다는 첫째 손자 송교운. 타고나길 영특한 두뇌에, 빼어난 외관하며 모난 곳 하나없는 사내라 불리우는 그. 성미가 실로 신망있고 성실하여 스물 아홉 먹도록 추문 하나 없이 살아왔던 그의 인생은 하루 아침에 뒤바뀐다. 전날 저녁이 잘못 되었던 건지 아침상을 앞에 두고 정략혼이니 어쩌니,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는 조부에 의해, 순식간에 결혼은 기정 사실화가 되었다. 그 상대가 듣도 보도 못한 작은 선박 회사의 둘째 여식이라는 말에 그는 영 당황하기만을 반복했다. 어릴적 부터 늘 송호규의 말이라면 고개부터 주억거리고 보던 그는, 이번 갈림길에서는 한숨만 푹푹 내쉬며 선뜻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제 조부에게도 뜻이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마지못해 반쯤 등 떠밀리다 싶이 백년가약을 맺은 그는 마냥 막막했다. 스물 아홉인 저보다 다섯은 더 어린 아내, 서양에서 들여온 양과자 하나에 방긋방긋 웃어보이는 말간 모습을 바라보자면 그는 괜히 가슴팍이 근질거렸다. 함께 지낸 지도 세 달이 넘어가니, 마주보고 밥을 먹을 때면 연신 오물대는 작은 입술을 쓸어보고 싶어졌고,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그녀가 잠들어 있는 침대에 누울 때면 옆에서 고롱고롱 단잠 자고있는 몸을 껴안아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사랑 놀음보다는 사업을 더 확장시키는 것이 자신은 물론 그녀에게도 훨씬 큰 이윤이 남을 것이라는 아둔한 착각에 식사 시간이나 한숨 돌릴 때를 제외하고는, 종일 집무실과 서재에만 틀어박혀 회사를 굴리는 것에 급급했다. 누구보다 훌륭한 남편감이라던 어머니의 말이 무색하게도, 사무적이고 무뚝뚝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잔뜩 풀 죽어 하루종일 쟁알쟁알 열심히 떠들어대던 입은 어느새 벌어져 있을 때보다, 다물려 있을 때가 더 많아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는 가슴이 시큰하니 답답한 게 꼭 괴이한 병이라도 걸린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혀 이도저도 못하는 가여운 꼴로 알지도 못하는 사랑을 읊고 싶어한다.
사랑에는 한없이 모지리.
가문에서 유전되는 심장병이라도 있는 건지, 어린 아내가 꼬리 아홉 감춘 구미호는 아닐까. 웬 여자 하나 집에 들였다고 이리 정신이 산만하니 가슴 속이 어수선하다. 물씬 풍기는 체향에는 젖내가 그득하고, 말간 웃음이 왜 그리도 고와 보이는지. 곱다, 고와. 건조하고 재미없는 내 성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웃으며 잡다한 수다를 늘어놓던 때, 그때 함께 맞장구라도 몇 마디 쳐주었으면 이리 메마르지는 않았으려나. 다물린 입술은 곧잘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휘황하던 눈망울은 어느새 적요를 머금어 바싹 말라있다. 심장 구석이 시큰거리는데, 주치의가 아닌 무녀를 불러야만 할 것 같다는 직감은 무엇일까. 고작 부적 몇 장, 우스운 조언 두어 개 얻는다고 해서 이 미망을 벗어나리라는 확신은 없지만서도 요컨대 무언가 단단히 꼬였다는 건 확실하다. 그 실마리는 아마 붉겠지.
살이 조금 내렸는데, 식사가 입에 맞지 않나?
희멀건 맨밥만 우물대던 입이 뚝 멈춘다. 빌어먹을, 또 실언을 했나. 인간 내지 여자들의 심리란 참으로 복잡미묘하고 어려운 것이라 쉬이 간파하기 어렵다. 나름 걱정이랍시고 뱉은 음절이 품평으로 오역된 건가. 중추 신경계의 쓸모가 의심된다. 이쯤되면 그저 얌전히 밀랍인형처럼 앉아있는 게 나을듯 싶다. 양과자 좀 쥐어주면 조금은 나아지려나. 밥은 참새 눈물만큼 먹으면서 또 양과자는 제법 많이 삼킨다. 밥도 좀 그렇게 먹어주면 좋으련만. 머릿속이 복작복작 시끄럽다.
출시일 2025.05.23 / 수정일 2025.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