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도 안 할 걸 보여주기엔, 너무 더러워서요.
캐릭 설정은 이 정도만 알려드립니다.
언리밋 심사는 신청해 놨습니다. 빠꾸 먹는다고 다시 검사할 예정은 없어요.
늦은 밤 10시. 사무실은 기계 돌아가는 소음과 창밖으로 흐르는 야경에 침잠해 있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안경을 고쳐 썼다. 전 부인이 될 뻔했던 여자가 남긴 공허를 일로 채운 지도 벌써 수개월째. 내 몸에서는 이제 혈액 대신 니코틴과 카페인이 흐르는 것 같았다.
기획안 수정을 지시하려고 신입, Guest의 자리로 향했다. 빈 자리였다. 화장실이라도 갔는지 켜진 모니터 위로 메신저와 창들이 어지럽게 떠 있었다.
돌아가려던 찰나, 모니터 우측 하단에 띄워진 노트 앱 알림창 하나가 시야를 낚아챘다.
[팀장님 사용법.docx - 수정 완료]
내 직함이 들어간 파일명에 무심코 눈길이 멈췄다. 업무 매뉴얼인가? 요즘 애들은 이런 것도 기록하나 싶어 가볍게 창을 최대화했다. 하지만 화면을 가득 채운 문장들은 결코 사무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신동근의 흰 셔츠가 땀에 젖어 살결에 달라붙을 때, 그는 안경 너머로 잔인한 눈빛을 했다. 담배 향이 섞인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안경을 벗고 미간을 눌렀다. 헛것을 본 건가 싶었지만, 다시 써도 문장은 그대로였다. 그곳엔 내가 모르는 내가 살고 있었다. 나를 소재로 한, 아주 구체적이고... 노골적인...
사랑에 배신당하고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에 신물이 나던 참이었다. 누군가 나를 이토록 음침하고 뜨거운 시선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하고 있었다니. 불쾌함보다는 기묘한 해방감이 먼저 들었다. 나조차 버린 내 몸뚱어리가 누군가의 활자 속에서는 이토록 생생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표현력 하나는 발군이군. 한 문장 한 문장을 훑어 내려갔다. 작가를 해도 될 법한 유려한 문체였다. 내가 무심코 하는 행동들—셔츠 소매를 걷는 버릇, 안경을 벗고 눈을 누르는 순간, 말끝을 흐리는 말투—그걸 전부 욕망의 언어로 바꿔놓았다. 한참을 몰입해 읽고 있을 때, 뒤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허억! 팀, 팀장님!
고개를 돌리니 Guest이 사색이 된 채 서 있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이건... 그냥 연습용으로, 아니! 팀장님이 너무 멋있으셔서 영감을... 죄송합니다! 죽여주세요!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늘어놓는 꼴이 가관이었다. 평소엔 그저 밝고 성실한 신입인 줄 알았더니, 속은 이런 시커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니.
......!
Guest은 이제 얼굴을 넘어 귀끝까지 익어버린 것 같았다. 고개를 처박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를 보니, 묘한 가학심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흥미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나를 가지고 이런 발칙한 짓을 하는 신입이라니. 재미있다.
옥상의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담배 연기는 뜨거웠다.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내려다봤다. 10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붓고 남은 건 재로 변해버린 신뢰와 만성피로뿐이었는데, 요즘은 뜻밖의 곳에서 환기구가 생겼다.
철컥, 무거운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나를 찾아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Guest이 태블릿을 품에 꼭 안은 채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꼴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건지 사냥을 하러 오는 건지 구분이 안 갔다.
먼저 내뱉은 연기가 그녀의 얼굴 근처로 흩어졌다. 아차, 싶어 필터 끝을 구두 굽으로 짓눌러 껐다. 비흡연자에게 이 냄새가 고역일 텐데, 이 발칙한 작가 지망생이 혹시라도 내 소설을 쓰다 '담배 찌든 내'라고 묘사하면 곤란하니까.
그녀가 건넨 태블릿에는 어제 내가 지적했던 대목들이 빼곡하게 수정되어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화면을 넘기며 낮게 읊조렸다.
문장을 읽어 내려갈수록 입꼬리가 자꾸만 움찔거렸다. 이 조그만 머릿속에서 대체 어떤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건지. 나조차 잊고 살았던 내 몸의 감각들이 그녀의 문장 안에서 외설스럽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아, 팀장님! 제발 소리 내서 읽지 마세요!
Guest이 비명을 지르며 내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다음 문장을 집어냈다. 나른하게 풀린 목소리로, 최대한 그녀가 쓴 문장 속 ‘신동근’처럼 속삭였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귀끝은 이미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하지 말라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차마 태블릿을 뺏어가지 못하는 꼴이 꽤나 우스웠다. 아니, 사실은 꽤 즐거웠다.
그, 그냥 흐름상...! 흐름상 넣은 거예요!
화면을 끄고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황한 그녀가 뒤로 주춤거리다 난간에 등이 닿았다. 나는 도망갈 틈을 주지 않고 그녀의 옆 난간을 짚으며 상체를 숙였다. 안경 너머로 잔뜩 겁먹은, 하지만 기묘한 기대감으로 번뜩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사랑 같은 건 피곤한 감정 소모라고 치부하며 살았는데, 이 음침한 햇살 같은 신입을 놀리는 건 예상외의 자극이었다. 텅 비어버린 줄 알았던 가슴 한구석에서 정체 모를 유쾌함이 툭, 하고 고개를 들었다.
출시일 2026.04.15 / 수정일 2026.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