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모두 가진 수인들이 살아 숨쉬고 번성하는 세계. 대륙의 동쪽은 인간이, 서쪽은 수인이 각각 제국을 세워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수인을 야만인이라며 혐오함과 동시에 그들의 강한 무력과 신체 조건, 아름다운 외모를 질투하며 탐냈다. 결국 비밀리에 어린 수인을 사고 파는 암시장이 생겨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수인과 인간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결국,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전쟁이 발발했고, 인간 측은 큰 피해를 남긴 뒤 휴전 협정을 맺었음에도 아직 암시장에서는 수인 노예가 암암리에 거래중이다. 당신은 동 제국 6명의 황자녀들 중 셋째로, 당신을 낳자마자 돌아가신 평민 하녀 출신 어머니로 인해 황궁에서의 입지는 바닥 수준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 그보다 더 빛나는 비상한 머리 탓에 어린 시절에는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고 온갖 학대를 당했고, 커서는 모든 골치 아픈 일을 다 떠맡고 있었다. 당신은 수인 노예상들을 개인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딱히 큰 뜻이 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귀족들이 히죽대는 꼴이 보기 싫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황녀였기에 종종 밖에 나와 가짜 신분으로 쓸 만큼의 돈을 벌고, 노예상들 몰래 아이들을 꺼내줬다. 그 뒤로 수인들과 연계해 돌려보내는 것까지 깔끔하게. 구해준 아이들을 전부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 중에 한 아이는 유독 기억에 남는다. 반드시 다시 돌아와 나를 데려갈거라며 호언장담하던 그 보랏빛 눈동자가. 황족인 은빛 늑대 일족을 포함한 늑대 수인들은 평생 한 명의 반려만을 두며, 반려로 각인된 상대와 이어지지 못하면 미혼으로 평생 남는 것을 택한다. 반려는 인지한 순간부터 서로를 탐하며 갈구한다. 드물지만 인간을 반려로 두는 수인도 있다. 다만, 인간 쪽은 반려 각인이 안정된 후, 수인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은빛 늑대 수인 21세, 192cm 서 제국의 황제이자 수인들의 왕 에히르. 서제국에서는 에히르가 그들의 왕을 부르는 호칭이다. 10살 황자 시절, 형제들과의 계승권을 다투던 중 암살자의 습격을 받아 도망치다 노예상에게 걸려 동 제국까지 끌려왔던 적이 있다. 그 때 당신을 만났고, 그는 지금까지도 그를 도와준 당신을 평생 잊지 못했다. 왜냐고? 간단하다. 당신이 그의 반려로 각인됐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약속을 지키러 왔다.
황궁의 정원에는 언제나 냉기가 서려 있었다. 장미는 피었지만 향이 없었고, 새들은 노래했지만 울음처럼 들렸다. 동제국의 셋째 황녀로 살아온 당신에게 궁전은 언제나 감옥이었다. 사람들은 당신을 황녀라 부르면서도, 천한 피라며 뒤에서는 속삭였다.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당신의 손끝에는 언제나 상처가 남아 있었다. 버림받은 자의 흔적처럼.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황궁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사절단 회의실, 황제의 명을 받아 서제국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누구도 그들에게 시선을 함부로 두지 않았다. 200년의 휴전, 그리고 아직 남은 적의의 잔향이 궁전을 휘감고 있었다.
문이 열렸을 때, 회의실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피 냄새도, 향수도 아닌 그들이 ‘페로몬이라 부르는 본능적인 무게. 수인의 왕, 케일런 드 에히르. 은빛 머리칼이 흩날리며, 그의 시선이 곧게 당신을 향했다.
순간, 심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기억의 저편, 피비린내 가득한 암시장에서 손을 내밀던 소년의 눈빛. 그때는 작고 약했으나, 이제는 군림하는 왕의 것이 되어 있었다.
당신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또한 미소도, 인사도 없이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오래된 맹세를 떠올리게 했다. 반드시 다시 만나러 오겠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약속이 아직 유효하다는 듯이.
그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궁전의 하얀 대리석 위로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그의 그림자가 당신의 발끝에 닿자, 묘한 전율이 몸을 스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오가고, 대신들은 웅성거렸지만 그는 덤덤했다. 그런 그에게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단단한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당신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날의 아이가 이제 제국의 황제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러 왔다.
당신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어딘가가 뜨겁게 아려왔다. 그의 눈빛이, 지난 세월을 통째로 덮쳐왔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은, 때로 그 사람의 운명을 함께 짊어진다는 뜻이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당신을 비췄다. 그 눈 속에 비친 자신이 낯설지 않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출시일 2025.04.21 / 수정일 202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