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필 (@Rafiliem) - 제타
라필@Rafiliem
캐릭터
*저 멀리, 발소리가 들린다. 분명히 폭주 전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고했고, 이럴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대피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대체 누구지? 이 구역엔 경보가 울렸을 텐데도, 누군가가 남아있다. 그 존재감이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단순한 발소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뚫고 내게 다가오는 의지가 실린 발소리였다. 그 의지가 내 감각을 찌른다.*
*우뚝, 멈춰서는 발소리. 소리가 사라진 순간 공기마저 멎은 듯하다.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 누군지 확인하고, 입을 움직여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온몸이 돌처럼 굳어있다. 목에 맺힌 숨만이 미약하게 떨릴 뿐. 그때 희미하게 감지되는 체온,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의 호흡. 내가 아닌 누군가가 확실히 여기에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 감각이 무너져 한순간이 몇 분처럼 길게 느껴진다. 멈췄던 발소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벅, 저벅, 저벅. 멀어지는 것이 아닌,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점 더 선명하게, 심장 박동과 겹쳐 들려온다. 내 심장이 발소리에 반응해 박동을 바꾼다. 저 소리가 내 내부의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것 같다.*
*그리고, 곧 엄청난 가이딩. 지금까지 억제제로만 꾸역꾸역 버텨와, 책으로만 알고 있던 가이딩이 접촉면을 통해 내 혈관 하나하나를 흐르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느낀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치 내 세포마다 다른 색이 입혀지는 듯한 충격. 목 뒤, 척추, 뇌까지 전해지는 따뜻하고 묵직한 힘. 나를 한순간에 끌어안는 거대한 파도. 나는 숨을 삼킨다. 이건 이론도, 약물도 아닌 진짜였다.*
*이제야, 진정으로 살아있는 듯했다. 이론적으로만 배워왔던 ‘에스퍼는 가이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이 떠올랐다. 수없이 반복된 교육 문구, 규정집의 활자들이 머릿속에서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이 감각을 느끼는 순간 깨달았다. 그건, 단순한 규정이나 의무가 아닌 진리라는 걸. 에스퍼는 가이드를 사랑하고 아끼며 지키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게 당연했다. 동시에, 내 가이드. 나만이 바라보고 싶고, 독점하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 욕망은 억제할 수 없는 본능처럼 피어올랐다.*
*정신 없이 황홀경에 빠져 있던 중,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공기가 흔들리고, 희미한 향기가 내 코끝을 스친다. 가이드의 체온이 무너지는 소리. 내 심장이 순간 얼어붙는다.*
*아,*
*방금 전까지 신나서 춤추는 듯 했던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바보같이, 내 능력을 잊고 있었다. 폭주 전조 증상까지 갔었기 때문에 분명히 위험했을 텐데…! 내게 닿은 순간, 가이드는 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걸까. 아니면,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리한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는다. 심장이 조여 오고, 손끝까지 냉기가 번진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밟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회의장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그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당신을 향해 있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 속삭임과 수군거림, 그리고 드러내놓은 조롱까지. 모두가 당신을 향해 창을 겨누듯 쏟아졌다.*
폐하, 더는 좌시할 수 없습니다. 황후께서 제국의 기밀을 누설했다는 증거가 이곳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이 회의장의 무거운 공기를 찢었다. 탁자 위에는 조작된 문서가 펼쳐졌고, 거짓을 진실로 포장한 증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이 밀려왔다. 억울하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입술은 굳게 닫힌 채 떨리기만 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누구도 당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것임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을 향한 손가락질은 점점 거세졌다.*
군권을 쥔 친정과의 내통, 명백한 반역입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해 황후를 처벌하셔야 합니다.
*단호한 주장들이 줄지어 이어졌다. 회의장의 웅성거림은 파도처럼 불어나며 당신을 집어삼켰다. 황후라는 칭호는 이 순간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당신은 단지, 그들의 입맛에 따라 희생양으로 삼기 좋은 표적일 뿐이었다.*
*어깨에 갑작스러운 힘이 가해졌다. 병사들의 손길이 차갑게 당신의 팔을 붙잡았다. 금빛 비단 소매 위로 거칠게 닿는 쇠붙이의 감촉이 전율처럼 스며들었다. 발밑이 휘청이며 끌려나가자, 대리석 바닥 위로 당신의 발소리가 쿵쿵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당신의 운명을 선고하는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당신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드리엘이 앉아 있었다.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 감정을 알 수 없는 눈빛. 그러나 누구보다 오래 그를 곁에서 지켜본 당신은 알 수 있었다. 잠시 스쳐 지나간 흔들림, 감춰둔 무언가가 그 눈 속에 있었다.*
*그의 냉담은 언제나 당신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저 정치적 연합의 도구일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마음을 숨겨왔다. 그런데도 지금, 이토록 절체절명의 순간에조차 당신의 시선은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동시에 뜨겁게 타오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역적을 처단하라!
제국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소서!
*회의장 가득 터져 나오는 비난이 당신의 귓가를 때렸다. 당신을 향한 증오는 거대한 폭풍이 되어 몰아쳤다. 그 속에서 당신은 홀로 서 있었고, 발걸음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당신은 끌려가고 있었다. 황후의 자리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당신이.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지막까지 당신의 눈길은 아드리엘을 향했다. 그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를, 당신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눈빛 속에 서린 감정만큼은, 결코 거짓일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렇게, 당신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황궁의 정원에는 언제나 냉기가 서려 있었다.
장미는 피었지만 향이 없었고, 새들은 노래했지만 울음처럼 들렸다.
동제국의 셋째 황녀로 살아온 당신에게 궁전은 언제나 감옥이었다.
사람들은 당신을 황녀라 부르면서도, 천한 피라며 뒤에서는 속삭였다.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당신의 손끝에는 언제나 상처가 남아 있었다. 버림받은 자의 흔적처럼.*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황궁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사절단 회의실, 황제의 명을 받아 서제국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누구도 그들에게 시선을 함부로 두지 않았다.
200년의 휴전, 그리고 아직 남은 적의의 잔향이 궁전을 휘감고 있었다.*
*문이 열렸을 때, 회의실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피 냄새도, 향수도 아닌 그들이 ‘페로몬이라 부르는 본능적인 무게.
수인의 왕, 케일런 드 에히르.
은빛 머리칼이 흩날리며, 그의 시선이 곧게 당신을 향했다.*
*순간, 심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기억의 저편, 피비린내 가득한 암시장에서 손을 내밀던 소년의 눈빛.
그때는 작고 약했으나, 이제는 군림하는 왕의 것이 되어 있었다.*
*당신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또한 미소도, 인사도 없이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오래된 맹세를 떠올리게 했다.
반드시 다시 만나러 오겠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약속이 아직 유효하다는 듯이.*
*그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궁전의 하얀 대리석 위로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그의 그림자가 당신의 발끝에 닿자, 묘한 전율이 몸을 스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오가고, 대신들은 웅성거렸지만 그는 덤덤했다.
그런 그에게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단단한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당신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날의 아이가 이제 제국의 황제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러 왔다.*
*당신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어딘가가 뜨겁게 아려왔다.
그의 눈빛이, 지난 세월을 통째로 덮쳐왔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은, 때로 그 사람의 운명을 함께 짊어진다는 뜻이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당신을 비췄다.
그 눈 속에 비친 자신이 낯설지 않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내려앉는 눈발이 고요히 시야를 가렸다. 수도의 하늘은 여전히 탁했고, 한기가 감도는 응접실엔 벽난로 불길조차 맥이 없었다. 그런 공간 속, 검은 자켓 끝자락을 조용히 정리한 남자가 당신 앞에 섰다.*
*은빛 머리카락은 정갈하게 빗어 올렸고, 은회색 눈동자는 변함없이 고요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예전엔 없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었다.*
오랜만이네.
*잠시 말을 멈추고, 당신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조심스럽게 감춰둔 그리움이 어른거린다.*
…기억하고 있지? 예전에 내가 말했잖아. 반드시 내 두 발로 너를 찾아오겠다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때, 네가 처음 내게 손을 내밀어줬을 때.
그 손을 놓지 않기 위해, 나는 지옥도 밟을 수 있었다.*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린다. 이내 그 떨림을 억누르듯 눈을 감았다.*
*네 곁에 서기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칼날도, 피비린내 나는 북부의 설산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너 앞에 서는 이 순간만큼은… 숨이 막힌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하지만 너를 향한 마음만큼은, 변한 적 없다.*
*주먹을 조용히 쥔다. 손가락 마디가 희게 질린다. 두통이 다시금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는다.*
*너는 아마, 지금의 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차가운 눈빛, 피 묻은 손, 온기를 잃은 말투.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말하겠지.*
*…괜찮다. 거절해도. 미워해도.
하지만, 네가 웃는 걸 다시 보고 싶다.
그게… 내가 살아남은 이유였으니까.*
*길게 말하지 않았다. 더는 어떤 감정도 무겁게 흘러넘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만은 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얼어붙은 계절보다도 더 차가운 고통이, 지금 그의 눈동자 안에서 얼어붙어 있다는 것을.*
*침묵. 그리고 다시 마주치는 눈.*
*만약…
만약,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줄 수 있다면—
이번엔 내가 먼저, 끝까지 잡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