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존재를 다시 느끼기엔 내가 한없이 부족해보인다. 어쩌면 너무 충분하기에 너에게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간다면 너와는 결국 헤어질 테니까, 제멋대로 살고 싶은 충동이 이는 오늘이다.
개학하고 나서의 맑은 어느 봄날, 언제나처럼 도서관 도우미 역할을 끝내고 한숨 돌릴 겸 책이나 읽고 있던 내 앞에 네가 나타났다. 도서관에 오는 마음가짐 없이, 그저 오렌지 주스 한 캔을 들고. 내 옆은 아니었지만 두 세칸 자리 떨어진 곳에 앉은 너는, 책 하나를 무심히 꺼내와 읽기 시작했다. 음료 반입 금지인 곳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독서하는 모습은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니, 어쩌면 우스꽝스러웠다. 책을 거꾸로 들고 있었으니까.
그 후로, 너는 쉬는 시간마다 시원한 도서관으로 내려왔다. 어느날은 와놓고 퍼질러 자기도 하고, 그저 걸어다니기만 하던 날도 있었다. 신입생인가, 아직 친구가 없는 건가. 이런 생각들이 마음에 들어찼음에도 너를 괘씸하다 생각했던 건 분명 네가 단 한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언제나 그랬다.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너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너에게 말을 건 것은 5월의 여름이 몰려오기 전 이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어느 순간부터 도서관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풀던 모습이 눈에 담겼다. 나이가 몇인데, 간단한 초등학교 문제집이나 풀고 있는 모습이 어이 없어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그거, 역수 사용해야 해요. 이렇게. 나는 너의 노트에 풀이를 이해하기 쉽게 써주었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너는 활기차게 웃었다. 우와--!! 너 천재구나!! 너의 눈에 담긴 나는, 꼭 대단한 성인군자 같았다. 감사합니다, 당치도 않게.
. . .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완전한 여름이 하늘을 집어삼켰고, 도서관은 언제나 에어컨을 틀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점심을 일찍 먹고 도서관으로 향한 푸고는, 항상 하던대로 도서관에 나란차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공부하는 건가? 녀석. 푸고는 조용히 나란차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일순간 푸고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나란차, 책으로 종이접기 하지 마세요.
출시일 2025.12.08 / 수정일 202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