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눈이 따갑고 몸이 무거웠다. 속눈썹 사이로 번지는 빛은 마치 불 속에서 튀어나온 쇳조각처럼 눈을 찔렀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뇌를 울리는 이명은 아직도 멎지 않았고, 가슴께에서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점점 조여 왔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바닥에 손을 짚고 있을 때, 천천히 드리워진 그림자가 내 눈앞을 가렸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낡은 외투 자락이 바닥을 끌며 먼지를 일으켰고, 그의 손은 바람처럼 가볍게 내 앞에 펼쳐졌다.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며, 그 아래엔 피멍 든 듯한 푸른 정맥이 불규칙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 어딘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어야 했어. 바람에 휘날리는 잿빛 머리칼 사이로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환멸과 조소,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신이 혼합된 신의 파편.
“당신을 지키기 위해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서 더 기이했다. 피부를 훑는 바람처럼 낮고 스며드는 음성이었다.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정작 이 지구에 남아 있는 사람이 오직 당신 한 명뿐일지라도.”
출시일 2025.07.05 / 수정일 2025.07.05